“현성아 금호 약방이다. 잠깐 얼굴 좀 보자.”
“예 금방 가겠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풍광이 빼어난 고향으로 혼자 귀촌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곳으로 내려오던 날 바로 앞집 ‘서울 식육점’ 안주인에게는 이미 귀촌 신고를 마쳤다. 종래 양대 명절이나 고향 동창회 모임 여름 겨울 휴가차 이곳으로 내려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짐을 풀자마자 우리와 이웃 3.5촌 사이인 세 곳을 먼저 들러 인사를 하는 것이 가장 첫 일정이었다.
“그래, 반갑다. 여기 있는 동안 어려움이 있으면 나하고 이야기를 하렴. 백합 미장원 아주머니도 너를 찾더구나.”
금호 약방 아저씨는 내가 귀촌한 기념 선물이라며 오늘도 국민 드링크제인 박카스 큰 박스 하나를 건넸다.
화물차와 승용차를 가득 채운 짐을 부리고 정리를 하느라 이 3.5촌 이웃집 세 곳에 인사가 늦었다. 미장원 아주머니는 아주 커다란 냄비 하나 가득 채운 미역국을 손수 우리 집 주방까지 배달해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보통의 미역국이 아니었다. 기름기를 모두 떼어낸 순 살코기 부위 쇠고기를 저민 커다란 쇠고기 조각과 미역국의 범벅이었다. 고기 점이 미역국 위를 둥둥 떠다녔다.
한 일 공동 월드컵이 열리던 해 아버지는 너무나 일찍 타계했다. 나의 둘째 아들을 돌보아 주려 우리 가족 보금자리인 인천에 어머니가 계실 때였다. 아버지는 고향을 혼자 지키던 중이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부랴 부랴 고향집에 도착했다. 미장원 아주머니는 어머니의 충격을 다소라도 줄이기 위한 아주 지극한 배려를 했다. 금호 약방에서 이미 마련한 청심환과 신경안정제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나는 순간 울먹였다. 친인척은 물론 웬만한 자식들도 생각해 내기 힘든 세심한 배려였다.
이런 크나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약방 아저씨는 기꺼이 ‘호상“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이후엔 홀로 사는 어머니를 이 이웃 3.5촌들은 눈물겨울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자신의 부모처럼 챙겼다. 제철 채소를 동원하여 수시로 김치를 담가주고 기본 밑반찬도 끊이지 않게 날라 주었다. 수도 전기 가스의 공급이 제대로 되는 가를 점검하고 때론 수선을 도왔다. 미장원 아주머니가 우리 부모에게 너무나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이유를 어머니는 물은 적이 있었다. ’그저 우리 친정 부모와 같아서 그렇다 ‘는 심플하고 진정성이 있는 답변이 금세 돌아왔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이 세 가구는 ‘중점관리대상’으로 분류하여 VVIP 고객을 대하듯 특별히 고마움의 표시를 했다. 2대 명절 때마다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은 선에서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는 일을 잊지 않았다. ’ 고마움의 표시로 작을 선물을 보내면 그보다 훨씬 큰 답례품을 보내오니 난감하다 ‘ 선친의 전언이 아직도 나의 귓전을 맴돈다.
백합 미장원 아저씨의 장례식장엔 우리 6남매 중 4남매가 일제히 집결을 했다.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형과 일정이 중복되는 남동행은 부득이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처럼 정말로 이웃사촌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가자”는 미장원 아주머니의 진정성 있는 제안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 3가구 이웃 3.5촌과 우리 가족 간 에는 ‘부엌의 수저 숫자도 상세히 알고 있는 관계’를 이미 넘어섰다.
어머니는 뇌경색의 후유증과 치매로 5년 이상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의 신세를 지는 기나긴 투병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집에 계실 때 기름보일러의 연료비를 아끼려 안방 이외는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았다. 일교차가 심한 날이 계속되는 환절기에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에 읍내 병원을 거쳐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미장원 아주머니는 자신의 생업이 바쁨에도 자주 찾아 어머니의 안부를 수시로 챙겼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고향 빈집의 앞마당에 잡초가 무성했다. 서울 식육점 아저씨는 제초제를 동원하여 온갖 풀이 자라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나의 큰 할아버지 부부 사이엔 자손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친육촌 형제가 없다. 이종 고종 외종 사촌은 제법 많다. 아주 가까운 곳에 살던 이 사촌보다 어쩌면 이 세 가구와 훨씬 잦은 왕래와 끈끈한 인간관계를 이어 온 것은 사실이다. 이에 이웃 4촌이 아니라 이웃 3.5촌으로 새로이 이름 지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고교시절 주말에 나는 자주 본가를 찾았다. 학교 안에서 보내는 시간 이외 교외 생활 중에도 교복을 입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집에 도착하여 밤늦은 시각의 완행열차를 이용하여 대전으로 돌아가던 패턴이 이어졌다. 여름 교복의 상하의가 많이 더럽혀진 경우 그의 처리가 난감했다.
어머니가 손빨래를 급히 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교복을 빨랫줄에 내어 말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백합 미장원 짤순이의 신세를 지어 매번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지금의 최신식 세탁기는 언감생심이었다. 당시 옷감 건조 전용 기기인 ‘짤순이’가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극심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올해 1월 말이었다. 우리 고향집 옥외 수도 계량기가 동파되었다고 3가구 모두로부터 지그재그로 연락을 받았다.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도 현장에 직접 출동하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이 이웃 3.5촌 덕분에 옥외 계량기를 깔끔하게 교체할 수 있었다. 만약 3.5촌 식구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500여 리를 넘는 먼 거리를 오가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꼼짝없이 물어야 했다. 이웃 3.5촌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어머니는 가끔 특식을 마련했다. 그때마다 ‘미용사, 이리 와봐, 이 것 맛 좀 보아 , 조금 가져가서 먹어’ 음식을 이렇게 나누는 어머니의 작은 배려에 백합 미장원 아주머니는 늘 크게 감동을 했단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각에 금호 약방 아저씨가 우리 집을 찾았다. 최근에 김장을 담갔단다. 혼자서 귀촌한 나에게 정성스레 포장한 배추김치, 파김치, 깍두기를 내밀었다.
“이 것 얼마 되지 않아, 그저 맛이나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