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제목부터 섬찟하다.
가끔 나도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상상한다.
누가 가장 슬퍼할까, 누가 울어줄까.
19세기 미국 남부의 농촌마을, 가난한 농부 앤스 번드런의 아내이자 다섯 남매의 어머니인 애디는
중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고,
장례를 치르며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다섯 남매의 태도와 행동은
그냥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은 열심히 관을 만들고, 애써 외면하고,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모르고, 문제에 휩싸여 관심을 둘 여력도 없고.
생각해 보면 무심한 듯 하지만 그게 사랑의 표현이라면
표현 아닐까?
가장 아끼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밥 먹어야 하고
똥 싸야 하고 며칠 지나면 세상사에 쫓겨 잊고.
어떤 의무감에 짓눌려 애써 추억하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내가 살아갈 몸부림일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슬프지만 살아내야 하는 현실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남편은 더 가관이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
그러면 그렇지. 부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존재 아닌가.
애디는 그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을 던진다.
시집와서 산 곳이 아닌 먼 자기의 친정집이 있는
곳에 무덤을 마련해 달라고 한다.
미국도 그 시대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의 인권이 없던 시대이니)
이 책을 읽으며 가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아직도 부모는 자식에 대한 배품의 빚에 허덕이고
자식은 사랑보다 능력 있는 부모를 원한다.
자식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쩌면 운명이라는 계약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계약은 파기를 금기시한다.
어쩌면 건강한 가족은 좀 더 서로에 대해
진실의 눈으로 보아야 할지 모른다.
의무감이나 계약이 아니라 객과적인
인간으로 서로 바라보고 핑크빛 환상에서 벗어나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으로 대하기.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서로 바라지도 말고
부담 주지도 않기.
의무감이나 부담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위에 아이러니하게 사랑은 푸르게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