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얻은 지혜

조금만 천천히

by 프리맨

나는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버스를 자주 이용하며 곧 죽어도 버스가 정차한 다음 일어나자고 몇 번을 결심해도, 어느새 일어나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버스 운전석 유리에 분명히 버스가 정차한 다음 움직이라고 경고 문구까지 붙어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해 보니 충분히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새를 못 참을까. 그러던 내가 버스가 멈춘 후 일어나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대견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노는 마당에 못 내리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도 별 문제없다.


이 마법은 스크린 골프에서 다시 한번 통했다. 친구랑 둘이 종종 스크린을 치는데 좀 느긋하게 스윙을 했더니 처음으로 이겼다. 힘을 주고 급하게 내려치다 보면 정타가 나올 수 없다. 한 박자 늦추니 몸에 힘이 덜 들어가고 거리가 많이 났다. 금방 달라진 나의 모습에 친구는 멘털이 무너졌는지 이제까지 못 보던 스코어가 나왔다.


친척 동생과 이년 만에 만나 처음으로 당구를 쳤다. 동생은 150, 나는 물 80. 보나 마나 개 끌려다니듯 끌려다니다 게임비만 내야 할 상황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우선 큐대를 꼭 잡지 않고 느슨하게 잡았다. 그리고 공을 때리려고 하지 않고 공을 미는 느낌으로 큐대를 움직였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며 첫 게임을 이겼다. 두 번째 게임은 동생이 불을 켜고 달려들어 하수인 내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세 번째 결승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그냥 볼에 집중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느긋하게 치자. 그러면 내가 원하는 대로 볼이 갈 것이다라는 생각만 했다. 결과는 역전승.


조금만 더 힘을 빼고 느긋해보자. 나의 일상도. 요즘 관심이 많은 요리도 급하게 만들려 하지 말고 과정을 충실하게 생각하며 만들자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이왕이면 혼자 먹더라도 우아하게 상차림하여 먹자. 마침 오늘 점심은 궂은 날씨를 생각하여 수제비. 우선 손부터 씻고, 재료를 가지런히 준비하고, 양념을 넣을 때도 한 가지씩 넣어가며 맛을 음미했다. 이쁜 대접 꺼내 수제비 담고, 김치도 먹을 만큼 덜어서 놓고, 수저 젓가락은 받침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가 만든 음식을 음미하며, 후추를 더 쳐서 먹어보기도 하고, 소금을 더 넣어 먹어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테스트를 했다. 그래. 이렇게만 하자. 뭣이 급할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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