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지음
런던을 갔을 때 나는 한 중년 남자의 이미지가 바로 각인이 되었다.
날이 흐린 날 나는 지하철 역 출구를 나왔을 때
나와 나이 비슷한 중년 남자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아주 환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한눈에 봐도 그 남자는 영국의 중류층 이상의 말끔한 신사였다.
우리는 쭈뼛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 이후로 나는 런던에 대한 일말의 의심과 불안을 걷어버리고
호의적인 마음으로 런던 시내를 활보하였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8편을 읽으며 나는 또 런던의 사람 사는
모습과 감정에 매료되었다.
미혼 학생모의 이야기인 '데비와 줄리'를 읽을 때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아직도 잘 모르는 여성과 젊은이의 세계, 그리고 그들과
살아가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짧지만 많은 것을 얘기해 주었다.
가족, 관계, 여성, 장애 등의 일상 소재를 통해 작가는 많은 울림을 준다.
대부분의 소설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듯 쉽게 다가오고
마치 옆집의 이야기인 양 낯설지가 않다.
왜 제목이 스케치인지 알겠다.
남편과 처음 떨어져 병원에서 자야 하는 여인, 딸의 장애를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엄마, 이혼한 남편과 엮이는 애매모호한 관계 등 한 번쯤 직간접적인 경험을
했을 법한, 그리고 고민해 봤을 주제들이다.
작가의 삶을 살펴보니, 영국 입장에서는 이방인 격이고, 이혼을 두 번 했고
많은 번민과 소외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이 소설이 슬프지만 따뜻하고, 힘들지만 희망이 있고, 어두운 얘기지만
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런던은 이 작가로 인해 또 하나의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이 결코 런던보다 이야깃거리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한 소설이다.
평범한 얘기가 스펙터클하고 웅장한 얘기보다 감동이 적지 않음을
알게 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