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기 종목을 참 좋아했다.
배구, 농구, 축구, 캐치볼, 탁구까지,
공이 오가는 그 찰나의 집중과 리듬이 늘 즐거웠다.
하지만 허리디스크로 고생한 뒤로는
그 모든 걸 내려놓았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건 생각보다 쉽게 내려놓아졌다.
“그래, 10대와 20대 때 충분히 했으니 됐다.”
“한쪽을 주로 쓰는 운동은 자세에도 안 좋지.”
이유는 명확했고, 기준은 단단했다.
몸의 한계를 인정하자 오히려 마음은 평온해졌다.
이제 나는 운동을 보며 부럽지 않았다.
그저, “저 때의 나는 참 열정적이었지.”
하고 미소를 지을 뿐이다.
하지만 돈 문제에 대해서는 늘 그만큼 단호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부동산으로 수익을 냈다거나,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거나,
강사료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딘가 불쾌한 기운이 스친다.
그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그들의 방식이 내 가치관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내 안의 ‘충분함의 기준’이 흔들리는 느낌 때문이다.
운동은 멈추면 낫지만,
돈은 멈추면 불안하다.
몸의 통증은 나로부터 오지만,
돈의 불안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운동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닫힌 세계이지만,
돈은 언제나 비교 속에 존재하는 열린 세계다.
허리디스크가 나에게 ‘자세의 교정’을 요구했듯,
돈의 문제는 나에게 ‘가치의 교정’을 요구한다.
몸의 불균형이 통증을 낳는다면,
가치의 불균형은 불쾌함을 낳는다.
나는 이제야 안다.
이 불쾌감은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미세하게 진화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을.
운동을 멈추는 것은
몸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다.
돈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삶을 아끼기 위한 선택일지 모른다.
몸은 내게 ‘통증’을 통해 배움을 주었고,
돈은 내게 ‘불안’을 통해 균형을 가르친다.
충분히 벌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결코 숫자에서 오지 않는다.
그건 마치 몸이 “이제 됐다”고 말할 때처럼,
마음이 조용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속삭일 때 온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안다.
불안이 멈추는 지점이 바로 나의 충분함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