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해치지 않으면서 ‘나’를 말하는 법
여름이 깊어갈 무렵, 아내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오래된 황토찜질방이 있다.
30년도 더 된 듯한 시설, 낡은 의자, 갈라진 타일 사이로 올라오는 따끈한 공기.
부자가 되기에도, 젊음과 화려함을 과시하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곳.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의 뜨거움과 시원함 사이를 오가다 보면 마음 한쪽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 나는 그 찜질방을 주 2~3회씩 찾아갔다.
오래 다니다 보면 ‘정’과 ‘익숙함’ 사이에 미묘한 불편함이 고개를 든다.
그중 하나가 10년 넘게 다녔다고 하는 한 할아버지의 휴대폰 소리였다.
찜질방은 원래 TV 소리가 배경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개인 휴대폰에서 들리는 쇼츠의 빠르고 자극적인 소리는, 그 조용한 뜸 속에 이상하게 크게 박혔다.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온몸이 풀어지고 싶은 시간에 자꾸 내 경계를 건드렸다.
참아보기도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어폰을 사서 드릴까 고민도 했지만, 마음속 불편함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던 오늘, 마침 또 그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쇼츠 소리가 찜질방에 울려 퍼졌다.
내 안에서 오래 미뤄두었던 문장이 천천히 올라왔다.
“말해야겠다.”
하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괜히 불편한 사람으로 보일까, 싸움이 날까, 싫은 소리를 들을까 하는 두려움이 겹겹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내 발은 이미 할아버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장님, 조금 떨립니다.
혹시 무례하게 들릴까 걱정인데요…
저는 이 찜질방에서 편히 쉬고 싶어서요.
혹시 휴대폰 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이 이어폰이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어폰은 괜찮다고 했지만, 이내 억울함과 서운함을 섞어 한참 이야기를 쏟아내셨다.
“여긴 원래 이렇게 다 틀고 본다”,
“젊은 사람들은 뭐만 말하면 따지고 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 말들 사이에 담긴 감정은 분명했다.
그에게 이 공간은 단순한 찜질방이 아니라,
10년 넘게 몸을 기댄, 자신의 흔적이 잔뜩 밴 ‘자기 자리’였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정체성과 억울함이 보였기에 끝까지 듣기만 했다.
그저 내 입장에서의 한 문장을 전했다는 사실로 충분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내가 평상에 누워 있는 것도 그 할아버지 눈엔 불편했을까?”
“그게 그분에게 피해였을까?”
나는 사람들과 공간을 나눌 때, 내 행동이 누군가의 시야에 걸릴까를 늘 신경 쓰는 편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 행동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그 공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 사이의 불편함은 늘 ‘기준의 차이’에서 생긴다는 것을.
나는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할아버지에게는 익숙한 문화가 흔들리는 두려움이 있었다.
둘 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만들어온 감각의 차이였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내 마음속의 작은 불편함을 정직하게 대면했다는 것.
그리고 그걸 타인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꺼내놓았다는 것.
그 한 문장을 말하기까지의 떨림과 용기가,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사람은 민원을 들으면 당장은 억울해도, 결국 조심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고, 그 할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이 작은 사건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배려 깊게 만들지도 모른다.
찜질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경계란 싸움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면서도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한 선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선을 아주 조용하고 단단하게 그었다.
그 한 문장 덕분에
내 마음에도 작은 평상이 하나 놓인 듯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