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를 놓아본 날

완치가 아니라, 삶이 돌아왔다

by 해피엔딩

1. 아내

요즘은 약을 먹지 않는다.
양약도, 한약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하루는 흘러간다. 아침이 오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잔다.

가끔 가렵다.
그럴 때면 예전처럼 겁부터 나지는 않는다.
‘아, 내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몸이 먼저 알려주는 신호처럼 받아들인다.

완치라는 말이 사라진 자리에
‘유지되는 삶’이라는 말이 들어왔다.

생식은 여전히 먹고 있지만, 약이라기보다는 간식에 가깝다.
이상하게도 그걸 먹으면 다른 간식이 생각나지 않는다.
뻥튀기와 강냉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감각.

예전에는
반드시 나아야 했다.
그게 삶의 조건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아도 좋고, 나아지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먼저 온다.


2. 나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숨을 고른다.
기쁘다. 정말로.
이 말들이 아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법륜스님의 『인생수업』에 나오는 이야기.

병원 근처에 살아도 죽는 사람이 있고,
산에 들어가 살아도 죽는 사람이 있다는 말.
의사가 6개월을 말했는데 3년을 살았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보너스라는 이야기.

놓아버리는 순간, 오히려 더 산다는 역설.

나는 그 이야기를
‘도움이 될 말’이라고 믿고 건넸다.

하지만 그때의 아내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터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밖은 밝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프기만 한 말이었다는 걸
그땐 몰랐다.


3. 아내

사실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전혀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준,
아프면 안 된다는 규칙.

누군가는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집착 말고는
붙들고 있을 것이 없었다.

놓으려면
먼저 서 있어야 했다.
마음이.


4. 한 번더 아내

올해 나는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연속으로 겪었다.

아이들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수업,
교사로서 성장하겠다는 계획들.
의도는 늘 좋았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 실패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내려왔다.

아, 내가 실수해도 괜찮구나.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받는구나.

상담실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그 말이 개념이 아니라 경험이 되었다.

그제야
‘놓아도 된다’는 말이
내 몸에도 들어왔다.


5. 그리고 아내

요즘 나는
내 감정을 예전처럼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화가 나면
‘내가 예민해서 그래’라고 덮지 않는다.
상대방의 책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허락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도 조금은 편해진다.

이 감정이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믿어도 될 것 같다.


6. 다시 아내

나는 한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서야 움직인다는 것.

초봄, 내가 동기 모임에서
고향사랑기부제 이야기를 듣고 남편에게 전해주었을 때

남편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남편의 입에서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어디선가 듣고 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그 순간
조금 황당했고, 조금 아쉬웠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 이 사람은
자기 마음이 설 때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이구나.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7. 함께

직접 경험한 것만이
사람을 바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우월함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

“내가 해봤는데 별거 아니더라”는 말 대신
“그래, 그 자리에 있으면 그렇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경험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학생이었던 시절을 지나온 우리가
지금의 아이들을 대하듯.
무조건 풀어주지도,
무조건 단호하지도 않게.

보듬되, 기준은 세운 채로.


8. 남편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확신하게 된다.

완치가 아니라,
삶이 돌아왔다는 것을.

결과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결과보다 먼저인 삶을
다시 손에 쥔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더 살고 싶다는 집착을 놓았을 때
비로소
더 잘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충분하다는 감각.

그 감각이
지금, 우리 부부의 가장 큰 회복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현금봉투를 주지 않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