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여성 지도자

'정치 외교관'의 꿈

by Lady Spider

# Gloomy Sunday

고2 여름방학 때 자퇴한 나는 혼자 독학하며 보낸 시간이 길었다. 게다가 이과로 바꿔서 시험을 보겠답시고 수학 2, 물리 2, 생물 2를 새롭게 준비했었다. 하지만 막판이 되자 이과 과목을 계속하느니 문과 선택과목 다시 골라서 보는 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예산 제약선과 능력 제약선 이렇게 수많은 제약선들과 악수를 하고 자기 합리화와 타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02년 수능은 언어영역이 어려웠던 불수능이었다. 남들보다 덜 틀린 덕에, 또 수능 등급에 비례해서 주어지는 내신 등급 덕에 나는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했다.


분노와 억울함이 몰아쳤던 사춘기 시절 내 마음이 eggplant purple이었다면 내 대학 초반부는 ebony black이었다. 동트기 시작하기 직전 가장 어두운 밤의 색깔. 영화 글루미 선데이처럼 측량없이 깊은 허무함, 우울감이 찾아왔다. 중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내가 불살라야 하는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기준도 명확했었다. 대학에 와서 그 목표를 이루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내 안의 열정은 불사를 무엇인가가 없으면 주체하지 못하고 깊숙이 가라앉아 버리는 그런 성질인 것 같다.


복학 후 마르크시즘이나 페미니즘, 민족사학적 언론비판 동아리(조선일보만 공격)에도 들어가서 활동해 보았지만, 왠지 진실의 장막을 거두어보면 삶의 민낯이 드러날 텐데, 그러한 것들을 애써 외면한 채 즐기는 가면유희 같았다.


우리 가족은 변한 게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에 단란주점 손님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술을 마셨고, 동생은 자라나고 있었다. 정말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으로 면 기록을 달성해 보자는 심정으로 잤더니 스물세 시간이나 잔 적도 있었다.


그래도 현실 제약선은 나를 잘 가이드해 주었다. 어쩌면 그 제약선에 대해 감사하다. 매 학기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면제받기 위해서는 늘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는 새로운 목표 설정은 뒷전으로 하고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실라버스에 나온 리딩 리스트는 강의 첫날 죄다 빌려놓고, 중앙도서관 3열에 자리 잡아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고시 공부하듯 전공 공부를 했다.


# American Dream, '정치 외교관'의 길

내가 대학 다니던 때에는 교환학생과 어학연수가 차차 보편화되고 있었다. 나에게는 등록금도 넘사벽이었기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영어책을 읽어주고(허밍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UNEP 활동, 관광진흥청에서 관리하는 관광가이드 봉사, 교내 교환학생들의 생활 안내를 해주는 활동을 했다. 이 모든 게 어학연수를 가지 못할 바에는 최대한 한국에서라도 영어 연습할 기회를 찾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당시 철학과 행정조교분이 내 사정을 딱하게 봐주어서 총장 명의 봉사활동 표창명단에 나를 넣어주었다. 봉사활동 포상금과 그동안 모았던 과외비, 어머니 단골손님이 좀 보태준 돈 다 합쳐서 나는 두 달간 첫 미국 여행을 떠났다.


다행히도 난 디씨, 샌프란시스코, 로드아일랜드, 미시간에 모두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미국 여행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제야 나는 웃음기를 좀 되찾고 삶의 목표를 찾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창밖을 바라보며, 내가 지극히 좁디좁은 틀로 세상 밖을 보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사시에 합격했지만 학생운동 참여 경력 때문에 도망가듯 미국에 유학을 와서 정착해 버리신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외무고시를 추천해 주셨다. 사시 보고 판검사를 하고 있는 동기들은 매일매일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마음으로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시며. 외국 살아보니 외교관이 좋더라시며.


그때서야 나는 어렴풋이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차 뒷좌석에서 뒹굴며 책을 읽던 시절, 한 일곱 살 때쯤, 아버지가 너는 "정치 외교관"이 되는 게 어떻겠냐셨다. 사실, "정치 외교관"이라는 말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마도 신문 같은 데서 보신 것 같다. '정치 외교관'의 꿈은 대학 졸업반이 되기 전에 그렇게 소환되었다.


# 21세기 여성지도자

위 사진들은 모두 뛰어난 지도자들이다. 대처, 메르켈, 클린턴은 남성, 여성이라는 젠더를 넘어서서 훌륭한 지도자이지만, 가끔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직은, 이 시대까지는, "여성" 지도자들은 그러한 숙명을 맞닥뜨려야 한다.


아버지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교육이나 독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종종 앞으로는 여성상위시대가 될 것이라고, 너는 "21세기 여성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습관처럼 말씀해 주셨다. 실제로 나는 자라는 동안 내가 딸, 여자라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집안의 대표선수였고, 대학에 와서는 더욱 남성적 권위의 세계(에 저항하고 싶어 하면서도), 거기에 나를 껴 맞추려고 했었다.


사실, 대한민국에 진짜 여성상위시대가 오기도 전에 우리 집은 이미 여성이 상위인 구조를 갖추었다. 나의 어머니는 자의 반 타의 반 가족들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는 전사 헬레나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여성 지도자를 강조했던 것은 자신의 신체적 쇠약함, 반복된 실패와 좌절 속에서 무언가 잠재력을 보이는 딸에 대한 대리만족과 같은 기대감을 표출하신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지, 아버지는 내가 대학 때 과외를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한참 과외로 돈 맛을 알아가려는 사이에 아버지는 과외로 등록금을 벌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게 낫다고 해주셨다. 세계적인 조만장자 그랜트 카돈도 자신에게 100불이 생긴다면 그 돈을 전부 자기 성장에 투자하여 200불을 벌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해서 잉여 소득이 생길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하마터면 가난을 탓하며 과외라는 쳇바퀴에 빠져들 뻔 했었다.

대학 때 철학과 선배들 어깨너머로 우연히 보게 된 라깡(프로이트, 융 다음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주로 언어학적으로 정신 분석)의 책을 읽으려다가 도중에 포기한 적이 있다. 아마 다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한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만큼이나 딸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와 구성되는 사회의 법과 제도의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오이디푸스 신드롬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심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딸은 아버지의 말씀으로 기호화된 체계 속에서 여성성을 제거하고 아버지를 닮고자 하는, 사회 속에서 "아버지의 딸"이 되려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그냥 성난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만 컸지만, 2012년에 아버지를 갑자기 보내드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줄만 알았던, 기차처럼 달려 나가던, 불모의 땅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 자라난 줄만 알았던 나의 사회적 자아라는 것의 뿌리에는 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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