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롱환자의 실상

아파도 웃는다, 아프니까 웃는다

by Lady Spider

# 백조 고시생

나는 미국 여행 후 외무고시라는 목표를 살짝 잡았었지만, 외무고시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국제정치학 수업에 빠져 영문학과와 함께 외교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바로 고시공부를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은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James Joyce, Virginia Woolf 같은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 Walts, Mearsheimer 같은 국제정치학 이론의 대가들의 원서를 읽으며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 4년 때 나는 어느새 공부를 즐기고 있었다. 졸업하는 해에 교수님들께 고시를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대학원 가는 게 아니었냐?"는 반응이었다.


학구적인 세계를 현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되었지만, 어느새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고, 백조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께 손 벌릴 수가 없어, 과외와 번역을 병행했다. 기독교 서적 원서를 초벌번역한 적도 있는데, 종교혁명 당시 칼뱅이 개혁파 무리들과 주고받은 서한집이어서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또한, 나름의 로맨스도 있었다. 도서관에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다 보니, 나에게 누군가 캔커피와 과일을 두고 갔고, 그 누군가가 곧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하루종일 자판기 커피 한잔에 국찐이 빵 하나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심각한 셀프 폭행이었다.


# 아파도 웃는 나이롱환자

다행히 운이 좋아 나는 괴로운 고시생활을 장기화하지 않고 짧게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딸이 나랏일을 하니까 당신께서도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며, 고향의 땅을 빌려 무궁화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2-3일은 시골에서 나무를 돌보고 3-4일은 서울 집에 올라오셨는데, 사실 보통 환자라면 그러한 장거리를 운전해서 다니는 것도, 넓은 무궁화나무 밭에 농약을 뿌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나이롱환자로 인식되었다. 하루 세 번 신장 투석을 하고 약꾸러미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 밖에는 환자로서 "앓는" 모습, 피폐한 모습이 아버지에겐 없었다. 오히려 요즘 트렌드가 된 귀농을 하겠다며 나무 공부를 하시고, 갑자기 밴드 활동을 재개하시겠다며 비싼 악기 먼저 구입하셨다.


아버지의 가장 큰 낙은 웃찾사, 개콘 같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시며 원 없이 크게 웃는 것이었다. 어쩔 땐 눈물이 찔끔 나도록 배를 잡으시고 껄껄 웃으셨다. 오히려 사지와 오장육부가 멀쩡한 우리 가족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겁다는 것이 표정에 역력했는데,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가장 생기 가득 찬 사람이었다.


또 다른 낙은 바로 "생계형(추가근무 수당 채우기)" 야근을 하고 돌아온 딸에게 늦은 저녁밥을 차려 주시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있는 동안에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다가 현미밥에, 파송송 계란탁 넣고 소금으로 심심하게 간을 한 계란국을 만들어 주셨다. 정말 초건강함이 느껴지는 절밥 같은 밥을 먹으며 나는 마치 세헤라자드처럼 하루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얘기해 드렸다. 그것을 듣는 것이 아버지의 아주 큰 낙이었다.


# 투병의 극단

2010년까지 여름까진 아버지의 투병은 아버지의 신체조건이라기보다 우리 가족의 경제적 여건에 가까웠다. 즉, 다달이 들어가는 병원비 빼곤, 아버지를 "환자"라고 부를 어떠한 명시적인 신체 증상이 없어 보였다.(물론 아버지께서 참으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2010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곱게 키운 무궁화나무를 아버지의 셋째 동생이 말도 없이 불도저로 다 파갔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뙤약볕에서 고생해서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나무들을 이제 적당한 구매자를 찾아 인도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아버지는 동생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진행했다. 바로 그때, 자세한 사정은 모르젰지만 아버지의 온몸에는 배신감, 분노감, 허탈함이 독처럼 퍼져 나갔을 것이다. (이미 이혼소송을 한번 제기했다가 기각을 당해본 나로서는 소송이 얼마나 기 빨리고 피 말리는 일인지를 안다)


2011년 화창한 봄날 아버지는 오랜만에 등산을 가셨다. 그때 어쩌다가 바위에 무릎을 찧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오른쪽 종아리부터 발바닥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간 기능의 약화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에는 아버지 배가 산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복수가 차올라서라고 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시골에서 서울까지 운전해서 왔다 갔다 하셨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는 화장실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119를 부르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질병이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자, 나는 처음으로 찌를 듯이 강렬한 아픔을 느꼈다. 이제 아버지는 나의 늦은 저녁을 차려 주실 여유도 없었고, 밤마다 양동이를 끌어안고 꺼억꺼억 하시며 갈색의 체액을 토해내셨다. 원래 처음에는 조금씩 도와드렸는데, 이제는 그 모습을 차마 내가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방에서 자려고 누워버렸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뺨을 지나서 차갑게 식더니 목 뒤로 자꾸 흘러내렸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나는 새벽 6시 반에 출근을 해서 영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외신을 찾아 읽었었는데, 단지 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을 뿐이었다. 새벽 사무실에서 홀로 일기를 쓰다 보면 가끔 슬픔, 두려움, 막함 같은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는데, 당시 회사 동료들이 마스카라가 번졌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가 최근 2020년(남편과 상사 때문에 이중고를 겪었던)과 함께 외교부 근무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 웃음의 의미

아버지의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분명 생에 대한 순수한 의지의 표출이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아버지만의 의식이었다. 내가 그때 조금만 나 자신의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 웃음이 얼마나 큰 의식적 노력의 결과였는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선 아파도 웃었고, 아프니까 웃으셨던 것이고, 그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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