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좀 둔감하다. 뭐든 없으면 없는 채로 지내고, 만족을 지연시키며, 힘듦을 견딜 수 있다. 이 모두 내가 둔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살기 위해 감각의 일부를 차단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상황을 최대한도까지 참다가 어떠한 결정을 하게 되면, 곧바로 뒤 돌아보지 않고 행동에 옮긴다.
2010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리고 회사에서 보내주는 연수에 지원하기로 했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난 공무원 초봉에 매달 200만 원씩 병원비를 보태드리고는 있지만 문제의 핵심원인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버티면 가족의 대표선수인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외교부에서는 주니어 외교관에게 1-2년간 해외 연수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른 부처들도 유사한 제도가 있는데, 다른 부처에서는 10년 차 이상의 중간 관리자가 연수를 가는 반면, 외교부는 입부 1-2년 차에 바로 연수를 가도록 되어 있다. 아마도 외국어와 해외 생활에 대해 최대한 빨리 적응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그날 이후부터 난 새벽에 눈물 훔치며 일기 쓰는 놀이를 그만두고(슬픔도 일종의 탐닉이다), GRE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연수 관련 절차를 너무 뒤늦게 준비하기 시작해서 토플도 GRE도 단 한번,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때까지 원서를 받아주는 단 한 개의 학교인 스탠퍼드 대학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해 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이 행동들은 20대 후반에 내가 나를 위해 실천했던 가장 진실되고 솔직한 시도였다.
# 꿈같은 현실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말은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해라"하는 말은, 자신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똑바로 마주 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내에서 연수 대상에 최종 포함되고, 스탠퍼드 대학에 합격한 후, 연수 가기 직전 날까지 야근하다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맞이한 "현실"은 너무나 긍정적이어서,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로 꿈과 같은 현실이었다.
미국은 풍요 그 자체였고, 갓 구운 빵에 녹아내리는 버터처럼 자유가 사르르 녹아내린 나라였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는 샌프란시스코의 친척집에서 일주일을 지냈는데, 정말 눈을 뜸과 동시에 그리운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나 강렬해서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아니면 시간 밖으로 나와있는 듯한 느낌으로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
스탠퍼드 대학은 사실 대학 초년시절에 처음 미국 여행을 왔었을 때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캠퍼스를 둘러보며 "과연 이 건물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건가요"라고 질문했었던 기억이 있다. 친척분이 정말 지나가는 말로 "You could study here"라고 했는데 'could'라는 조동사의 위력이 그 정도 될 줄은 몰랐다.
역시 가족의 상황이 물리적으로 멀어지자 마음이 조금 나아지기 시작했다. 교수님이나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내가 극강의 "E" 성향임을 알게 되었다. 각종 모임에 나가고, office hour도 많이 잡고, 다른 한국 유학생 친구들과도 진짜 재미있게 놀았다. 왠지 그게 더 나 자신 같았다. 특히 영어로 말을 할 때 나는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자아가 되었다.
이공계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알게 된 덕에 구글, 페이스북 본사도 구경을 갔었다. 거기서 알게 된 것은 혁신은 바로 풍요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캠퍼스 내 도서관 앞에서는 커다란 분수가 있었는데, 보통 분수가 물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모양인 반면, 그 분수는 물을 보이지 않게 확 끌어올려서 쫙 쏟아내리는 모양이었다. 그 앞에서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미국 학생을 보고, 나는 정말 이런 풍요와 자유가 혁신을 만든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필요와 결핍이 발명을 이끌던 모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나는 연수 내내 학교 공부에 진심이었다. 어학연수도 교환학생도 못 가본 한국 토박이가 처음으로 네이티브 스피커가 온 천지에 깔린 언어환경에 처해본 것이라, 매 순간이 정말 기회였다. 나는 매일 벅차고 행복한 마음으로 그린 도서관에 출근을 했고, 그 앞에 있는 쿠파 카페(아직도 있다고 한다)에서 커피에 베이글을 아침으로 먹었다.
# 유리알 천국
1년간의 미국 연수는 공항 기념품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있는, 물이 찰랑찰랑하고 흔들면 눈꽃이 내리는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아주 예뻤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예쁜 유리구슬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모형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듯이, 그때 내가 만났던 세계는 유리알 천국이었다.
나는 1년 여 기간 동안 파티와 모임, 여행,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사람과 세계를 만나는 일을 마음껏 했지만, 그러면서도 무언가 겨울날 핀 꽃도 속일 수 없이 추운, 자전거를 타고 야자수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런 진짜 "현실"의 그림자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유리알 천국의 그림자는 커다란 싱크홀이었는데, 그것은 여전히 아버지 병원비를 보내주고 있는 현실,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현실, 그리고 곧 대입을 앞두고 있는 동생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요양원에서 바라보았던 아버지의 서글픈 눈빛이었다. 이 그림자 때문에 그 행복한 시절 속에서도 이것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만의 휴가라고 여겼던 것 같다.
특히, 동생이 고3일 때, 나는 동생 옆에서 누나로서의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절대음감이었고 리듬감이 정말 좋았었기에 실용음악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멋진 이 꿈을 응원했었는데, 동생은 끝끝내 대입을 포기했다. 누나와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동생은 우리 집에서 학자금 대출 없이는 대학을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또한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4년제 대학을 나올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명박 대통령 때 고졸취업을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졸취업을 선택했다. 지금 서른 인 동생은 이미 업계에서 10년 차 선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