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를 묘사할 때 써보고 싶었던 단어이다. 누구든 언제든 나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인생 얘기를 나누다보면 "개룡녀네!"라는 반응이 많았다. 물론 대한민국에선 어떤 개천 출신의 어떤 용인지에 따라 레벨을 나누려 하겠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불광천 인근에 서식하는 도룡뇽도 용 아니겠는가.
회사 선배나 동료들의 어디 사냐는 질문에 "응암동이요" 라고 하면,
"응암동? 거기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인가?"
"음, 거기 학군 안 좋다던데, 중고등학생들이 면도칼 씹고 다닌다는데요!" 하는 반응이었다.
그렇다. 나는 은평구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마흔 가까이 될 때까지 줄곧 은평구에서 살아왔다. 중학교 때 좋은 성적으로 외고에 갔지만 외고에 더 다닐 등록금이 없어서 자퇴를 했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보았다. 운좋게 수능 점수가 잘 나와서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했다.
대학에선 낭만이라곤 하나도 없이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시험기간 마다 도서관에서 밤을 샜다. 평소엔 과외, 번역 알바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등록금 면제를 받기 위해서는 휴학이 안되었기 때문에 매학기를 게임 스테이지 도장 깨듯이 연이어 다녔더니, 그러다보니, 어느새 졸업을 해버렸다. 진로 고민을 깊이 할 여유도 없이 "백조"가 된 나는 그나마 "비용"을 최소화 할수 있는 외무고시를 시작했다. 1년만 하고 안되면 우선 취업해서 병행해야지 하고 마지노선을 그었다. 그런 고시 조차도 과외, 알바, 텝스 강의를 해가며 고학을 했다.
하루종일 서너 시간만 자고 빵 하나에 커피 한잔으로 연명했던 나의 그 독기, 악바리 광기의 끝에서 신도 지쳐버렸는지 고시를 준비한 지 1년 여만에 외교부 합격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15년 동안, 남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요즘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외교부에서 휴직 1년도 없이 쭉 일만 했다.
# 아버지
이러한 삶은 이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이 보기에도 정말 각박하고 괴로울 것이다. 물론 내가 기억해 낼 수 없는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유도 모르게 단순히 행복했었을 순간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나의 과거는 진열용으로 서가에 꽂아둔 비극들처럼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천 길 물속을 걷고 있는데 어깨 위론 누군가 나를 짓밟고 있는 느낌, 애써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만 하늘이 투명한 유리로 막혀있는 그러한 감옥에 사는 느낌이었다. 매일이 탈출 전의 "쇼생크 탈출"을 찍는 것처럼, 늘 나는 전력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온 몸이 땀에 젖고 숨이 차오르지만, 알고보니 꿈일 뿐, 꿈에서 깨어보면 매일 같은 그 자리였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면, 내 지난 40년의 삶은 "노오력의 무한반복" 프로그램일 것이다. 물론, 아주 미세한 높이 차이가 있는 아주아주 완만한 계단을 오르는 듯한 착각이 찾아올 때가 있었지만, 그 착각도 잠시일 뿐 핵심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노오력"이었다. 심지어 난 몸까지 튼튼해서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고급진 노예의 조건을 타고났다. 백화점 같은 곳을 가면 괜히 위축되었던 나는 화장품은 샘플만 쓰고, 구두 굽이 너무 닳아버려서 쇳소리가 날 때까진 새 구두를 사지 않았다.
지금까지 독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내 인생을 2배속으로 돌려 요약해 보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는가? 왜 나는 정해진 삶의 틀 안에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안에서 또 선택을 이어가면서 착한 고급 노예의 매일을 반복하면서 살아왔을까?
이러한 나의 삶에 아버지는 (내 마음에서) 커다란 제약선이었다. 그 제약선은 빠져나갈 수 없이 너무나 명확한, 나에게 "무기력", "불가피" 같은 단어들을 특별한 노력없이 무의식 깊숙히 새겨주었던 굵다란 선이었다. 그 선은 정확히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에게 찾아온 질병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4학년이 되던 해부터 당뇨병에 걸리시더니 이후 합병증으로 신부전증, 간경화까지 걸리셔서 20년 가까이 고생하시다가 2012년, 내가 서른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20년의 세월은 우리 가족, 즉, 어머니, 나, 내 남동생의 삶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어머니는 아프신 아버지 대신 홀로 노래방, 단란주점, 식당, 옷가게 등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역할을 하셔야 했다. 나보다 11살이나 어린 내 남동생은 한참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어린 나이부터 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병수발을 해야했다. 나는,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악바리 모범생으로 공부하기)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유년시절 대부분을 "공부"와 "생존"이라는 것에 내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다.
# 그리고, 나 = Eve without Adam's Ribs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아버지의 질병은 어찌보면 내가 "신의 직장"을 다닐 수 있게, 끊임없이 채찍질 하면서 생존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도록 해준 실존적 조건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렇게 힘들게 얻은, 남들이 말하는 성공 안에서 만족하면서 계속 살아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형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작년까지 내 마음은 만신창이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바로 그 다음 해에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에 방황하면서 급하게 결정했던 결혼은 완벽한 "실패"였다. 그나마 끝없는 노오력으로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나는 처음으로 그 노오력 마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회사에서 난 맨탈갑, 초긍정 캐릭이었고, 특유의 노예 근성으로 억척스럽게 열일 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회사만이 유일한 피난처, 안식처였고, 놀이터였다.
"마흔러"의 매직인 것일까? 알수 없는 공허감과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해 박사학위나 요가 같은 일상의 작은 변화를 꾀하고 있던 와중에 나는 작년 10월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의 해양장을 치르게 되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면서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실제 아버지의 유산은 담보대출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집 한 채였다. 나와 내 동생은 상속을 포기했다. 유산(legacy)이라는 것은 영광스럽고 소중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아담의 갈비뼈 없이 태어난 이브는 어떠한가? 갑옷없이, 맨주먹 쥐고 맨발로 딛고 일어선 이브의 삶은 깃털보다 가볍다.
순간 나는 어깨가 정말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동안 내 어깨가 무거웠던 것은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지운 짐이다.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 삶의 제약선은 내 아버지가 아닌 내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 때 나는 40년 가까이 살아온 내 삶의 모든 것을, 이름만 남기고 바꿔버리자고 다짐했다. 외교부를 정년까지 계속 다니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적 명예, 경제적 안정성을 버리고 삶을 한꺼풀 벗겼을 때 뭐가 남을 것인지 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알았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생각했던 내 모든 조건들이 축복이었다는 것을. 그 축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살아본 인생을 초기화하고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자각이었다. 왜냐면 인생은 깃털보다 티끌보다 가벼우니까.
이 책은 나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 애도, 그리고 아버지와의 진짜 이별, 아버지 "때문에" 제약되었다고 믿었던 내 과거의 삶, 전생과의 단절을 위한 과정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