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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dy Spider Dec 17. 2023

솔직히, 앓아서 좋았다

부디 특이 취향이 아니길

금요일 오후였다. 갑자기 머리가 살짝 띵~ 하더니 온 몸이 살짝 뜨거워진 느낌이었다. 할 일도 많고 생각할 일도 많았는데 처음으로 "아 좀 하기 싫다"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하지만 두 번째 아마존 전자책 번역을 이번주까지 마무리 짓기로 계획했기에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AI 리서치 클럽 마지막 날이라 마지막 소감도 써야했고, 댄스 선생님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창업 구상도 구체화해야 한다. 항상 그렇듯이, 신체 부위 중에 망가지면 제일 힘든 것이 뇌다. 일단 몸이 좀 이상했지만 모든 계획은 이행했다. 그랬더니 저녁 9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몸이 으슬으슬 춥기 시작했다. 


번역을 마무리 했으니 책표지 구상을 하려했는데! 당최 너무 몸이 추워서 머리와 무릎을 봍이고 공처럼 둥글게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좀 지나자 엄청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데, 열은 나는데 땀은 나고 몸은 추운 아이러니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앓았던 건 2017년 중국 근무 시절에 A형 독감에 걸렸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갈 때도 무증상 감염이었는지 아님 아예 무감염이었는진 몰라도 한번도 안 아프고 지나간 데다가 심지어 백신 접종 증상도 대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게 뭔지 모르겠는 정도로 그냥 지나갔었는데. 


근데, 침대에서 공벌레처럼 웅크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자니, "참 이렇게 앓아본지도 참 오랜만이네" 싶었다. 예전에 "노화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노화를 방지하는 유전자는 생존을 위협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자극된다고 한다. 항노화, 혹은 slow aging의 방법으로 냉수 목욕이나, 5분간 고강도 유산소 운동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노화방지 유전자의 "생존" 욕구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인 것이다. 열이 뜨겁게 올라가는데 왠지 내 몸 안에 쓰레기 잡것들이 다 태워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불필요한 생각들도, 불필요한 타인들의 속삭임도, 근거없는 걱정들도, 쓸데없는 미련도 감정도 전부 다 타들어갔다. 


약국에서 산 고농축 비타민씨와 감기약을 한웅큼 넣고 물을 계속해서 마시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는 나에게 응원 요청을 한 친구들에게 영상을 찍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전혀 응원이 될 수 없겠다 판단이 든 나는 병원에 가기로 한다. 병원에 가서 열을 쟀는데, 글쎄... 간호사가

"39.6도 네요! 열이 매우 높으세요!!! 여기까지 걸어오셨나요?"


걸어왔는데. 암튼 의사 선생님 말로는 몸살 감기일 수도 있고 독감일 수도 있고 심지어 코로나 일 수도 있다는데!!! 코로나를 제대로 안 걸려본 나로서는 이게 코로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상으로 치면.. 2017년 걸렸던 독감에서 근육통만 없는 버전이었는데, 분명!! 그래서 타미플루 두 알만 먹으면 정말 잠잠해 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일단 의사 선생님이 증상을 지켜보자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냥 나는 해열제 주사만 맞고.. 기대했던 항바이러스 수액은 받지 못했다. 그게 딱 한방일텐데.


돌아왔더니 목이 금방 나아져서 영상을 다시 촬영했다. self-employed 상태가 되다 보니, 내 몸 하나가 내 하루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단 압축해서 회복에 우선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있었던 연말 모임도 못 간다 하고 PT도 날렸다. 흙흙... 하지만 빨리 나아야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요즘 나는 거의 "솔로몬 경제" 원리에 따라 섬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몸이 아프면 안되고 정신도 올곧아야 하며, 셀프 지시를 하고 셀프 이행을 해야 한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정신차리고 살아야 한다. 이를테면 생산 설비를 빨리 고쳐야 그 다음 날 굴려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토요일 하루 off를 명령했다. 


확실히, 그리고 다행히, 병원이라는 곳에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플라시보가 있는 것인지 그 이후부터 내 몸은 쑥쑥 회복되었다. 노트북을 열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지만 점점 더 맑아지는 정신을 느끼며 일단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며칠 째 창업하는 꿈을 꾸었다. 글쓰기 공모전에 나가는 꿈을 꾸었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꿈도 꾸었다. 글쎄 나의 그 "꿈"들을 현실화시키려면 이 몸 뚱아리와 그 몸 뚱아리의 핵심 시스템인 뇌가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약간 안개 낀 것 같이 sub-obtimal 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열도 안나고, 땀도 안난다. 목도 안아프다. 앓고 나니 너무 시원했다. 한 번 정도는 몸을 한 번 싹 다 뒤집을 만한 기회로 삼아도 될만한 의식 같다. 어쨌든간 나는 회사라는 외부조건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내 스스로 가치 창출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무조건 견디고 한계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평균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을 취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업 앤 다운의 폭을 최대한 줄이고 뭉근한 평균값을 꾸준히 끈질기게 가져가야 한다. 절대로 "오늘까지만" 이라는 과로도 안되고, "내일부터" 라는 안일함도 안된다. 그래서 그 수많은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이 중용을 강조했나보다. 겪어보니 그러하다. 


요즘 나는, 중용을 체득하고 있다. 그래도 솔직히, 앓고나니 좋았다. 그렇다고 살짝 M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참, 내가 감기 걸렸다고 하니 딸램의 반응이 재밌다. "그 천하의 외계인 같은 엄마가 감기에 걸렸다고?" <-- 대체 이런 표현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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