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걸었다.

오늘은, 걷자.

by 마흔아홉

퇴근하고 집에 왔지만 오늘도 여전히 아무도 없다.

오늘은, 무엇을 하지?

노자의 말씀처럼 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즐기면서

마음을 비우고 내 생활을 즐기려 했지만

역시나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아직은 내가 기다려줘야 하는 사람만 있다.

할 일도 딱히 없고

전처럼 찾아가서 챙겨드려야 할 아빠도 없다.


제법 해가 길어지는 게 눈에 보이는 요즘이다.

겨울의 살을 에이는 것 같은 바람이 아니라 시원스레 스치는 바람,

내가 제법 좋아하는 바람이다.

갱년기로 올라오는 열을 잡아주는 데는 이만한 게 없기도 하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걸어볼까 싶다.

집 근처에는 OO구단 전용 야구장도 있고 야트막하지만 산도 있고 하천도 흐른다.

하천에는 둘레길도 있고, 자전거 길도 잘 닦여져 있다.

오늘은, 걷자.


야트막하다 해도 산은 산이라 저녁시간에 오르기는 부담스럽고 해서

하천을 따라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달리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걷고 있었다.

나만 목적 없이 걷나 싶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꽤 멀리까지 걸었다.

아까까지 시원스레 불던 바람이 제법 세지기 시작했다.

휘이이 소리를 내기도 하고 등을 떠미는 듯 때론 우악스럽기도 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육중한 내 몸이 밀리는 게 바람의 중력이 느껴진다.

하천도 강이라고 강바람이라 그런가?.


그때였다. 비릿한 하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아, 나는 여전히 숨을 쉬는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다.

이제 엄마, 아빠는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또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그런 날들이 반복된다.

고까짓 걸었다고 숨이 차오르고.

역한 냄새에는 짜증도 올라온다.


숨이 차니 힘이 들고 힘이 드니 눕고 싶은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서둘러 집으로 가려는데 그제서야 주변이 보인다.

눈에 가득 찬 초록잎들에 "좋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벚꽃이 진지 얼마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푸른 초록이라니.


엄마와 아빠는 이 좋은 계절을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나는 이 계절이 눈에 들어오고 또 좋다고 느낀다니,

간사하다 싶어,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려는 듯 꿈틀거린다.

여전히 비릿한 냄새가 싫었고, 이 계절의 초록이 좋다고 하루를 살아내는 내게.


스멀거리는 죄책감을 한켠으로 밀어내고 발길을 돌렸다.

'내 잘못이 아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더니 어둑하니 어둠이 내려온다.

한참을 걸었더니 배도 고파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아빠 혼자 계실 때는 이런 생각조차도 사치였었다.

나에게는 챙겨야 할 나의 아이들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따라가고 싶다는 아빠를 다독이는 게 급선무였다.

비어있는 시간이 없었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마저 가신 지금,

아빠를 위해 비워두었던 시간들은 고스란히 공백으로 남았다.

장례식장에서 막내작은어머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OO아, 너무 슬퍼하지 마. 솔직히 전보다 편할 거야. 아빠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나도 딸이잖아. 그래서 알아. 아빠 챙기느라 힘들었지? 이제 덜 힘들 거야. 자식 입장에서는 슬프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편해. 이제는 너만 생각해."


그때는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라 그런지 작은어머니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었고

솔직히 야멸차다고까지 생각했었다.

한치 건너 두치라 그러는가 싶기도 했다.


기껏해야 반년이나 지났을까?

지금에와서야 나는

막내작은어머니의 말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죄스럽지만 몸은 편하고 시간이 남아도니 말이다.

이 사실에 또 울컥한다.


여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말고 내 생활은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중이다.


한 때는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와 아빠였을텐데

언제부터 내 세상에서 밀려나 있었던 거지?

슬프다.


엄마와 아빠가 안 계신다는 사실에 한쪽 가슴이 저릴때가 많지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울 땐 여전히 나는 웃고 있다.

힘들 땐 짜증도 내지만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전과 달리 감사한 일도 많아졌다.

물론 전과 달리 남편한테 많이 치대는 중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저런 암울한 생각들은 여전히 시도때도 없이 나를 덮쳐오지만

그때마다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아니 노력 중이라는 게 맞겠다.

다행히, 버둥거리는 나를 지탱해 주는 건

본의 아니게 얽힌 인연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일군 나의 가족이란 사실에 뿌듯해하며.

나는 그저 살아내며, 헤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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