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상처받았나요?

책방에 가다.

by 마흔아홉

내 마음 편하고 싶어서 잊어버리자, 기다리자고 했다.

남의 칼로 원수를 갚는 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 했는데

난 아직은 지혜롭지 못한가 보다.

아니, 멀은 것 같다.

꾸역꾸역 치밀고 오는 생각들을 여전히 어쩌지 못하니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각자의 생활로 바빠졌다.

남편은 남편대로 바빠질 시기다.

근무 중에는 그럭저럭 시간도 흘러가고,

복잡한 생각들에 어지러울 마음도 없었는데

퇴근 후 집에서는 달랐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들이 아직은... 그랬다.

채널을 돌려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남편이, 아이들이 올 때까지 혼자 있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집순이라 혼자가 편했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유달리 힘들던 나였는데,

그렇지 않은 날들이 많아졌다.


유독 외근이 많았던 오늘은,

걷기도 힘들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멀리 가기는 싫고 집에 있기도 싫고,

고민하기도 번거로와서 무작정 집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서점이 좋다.

사지 않더라도 책 구경 하고 있으면 편했다.

무슨 책이 좋을까 하나 둘 집어 들어 읽다 보면 머릿속을 괴롭히던 생각들이 제법 잘 사라진다.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작「소년이 온다 」 개정판이 중앙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권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가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채식주의자도 쉽게 읽혔던 작품은 아니었던 터라, 아직은 읽을 때가 아닌가 보다 싶어 내려놓았다.

몇 권의 책을 더 집어 들었지만 여전했다. 역시나 쉬이 읽히지 않는다.


건성건성, 수박 겉핥듯 눈으로 흝어내려갔지만 눈에 걸리는 책이 없다.

때가 아닌가?

그렇게 떠돌듯 돌아다니고 있는데

'오늘도 상처받았나요?'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 아래 빼곡하게 들어찬 부제가 눈에 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술 빼고 다 있는 스낵바가 문을 연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었다. 마스다 미리는 예나 지금이나 꽤 좋아하는 작가다.

본업은 만화가지만 에세이도 쓰고 그림책도 출간하는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인데,

소소한 일상을 담백하게 그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을 걸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를 좋아한다.


제목만 봐도, 나를 위한 책 같았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술 빼고 다 있는 스낵바라...


스낵바에는 언제나 카운터에 한 손을 반쯤 걸친 채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라는 말을 건네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주인장, 도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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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 잘못했다 편가르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뿐.


지금의 브런치가, 나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님들이

나에게는 도코와 같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는 상처를 받았고 헤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악의 없이 부딪혔던 사소한 기억들은

그 순간에는 비록 상처였더라도,

금세 아물어 나를 키우는 거름이 되어주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작정하고 낸 상처들은 쉬이 아물지 못했고 꼭 상처로 남아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생채기를 남긴 상처를 볼 때마다 깨닫게 된다.

상처의 주인과는 결코 그 전의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행히 내게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일편단심 내 편인 내 뜻을 지지해 주는 내가 일군 든든한 나의 가족이 있다.


내가 일군 나의 사람들,

내가 일군 나의 가족,

그것이 내 삶이라 생각하며


본의 아니게 얽혔던 지루했던 인연과 나는 지금 헤어지는 중이다.

오늘은 이 책을 읽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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