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이 엄마가 오셨다. 보행기를 밀고 불편한 걸음으로 모퉁이 돌아 우리 집까지 오셨다. 시골집에 내려와 며칠 텃밭 일을 하는 사이누굴까 궁금해서 오셨단다.
혜경이는 한동네 소꿉친구다. 나이는 같지만 내가 막내 동생을 보느라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으니 초등 선배인 셈이다.
당시 혜경이네는 대가족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님과 8남매나 되는 형제들, 거기다 행랑채에 사는 일꾼 아저씨까지 어쩌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잔칫집 마냥 북적북적했다.
혜경이네는 씨족 집성촌인 우리 동네에서 타성받이로 뿌리내린 땅부자였다. 마을 앞 들판이 거의 다 혜경이네 땅이었다.
옛 말에 시골 부자는 일부자란 말이 있듯 혜경이네는 머슴 사는 일꾼 아저씨까지 있는데도 혜경이 엄마까지 논일 밭일에 매여 살았다.
어린 생각에도 그 많은 식구들 식사에 집안일까지 해내는 혜경이 엄마가 엄청 대단해 보였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아이러니는.
땡볕에 나와 해종일 일 하고 살아도 혜경이 엄마는 선크림을 바른 듯 항상 얼굴이 뽀얬다. 엄마는 그런 혜경 엄마를 보고 분칠 한 것 마냥 피부가 좋다며 엄청 부럽게 얘기하는 걸 듣고 자랐다.
그 집엔 혜경이 말고도 딸이 셋이나 더 있었는데 하나 같이 곱상하고 피부가 하얘 만날 바깥에서 함께 놀아도 그 집 애들만 반질반질 매꼬롬했다.
도시에서 갓 전학 온 것 같은 혜경이를 좋아하는 남자 얘들도 몇 있었다.
그런 혜경이 엄마가 한 때는 많이 아파 바깥출입을 못하고 몸져누웠다는 얘길 엄마가 계실 때 들었었는데 이렇게 발맘발맘 걸어서 우리 집까지 마실 오시다니 나는 놀랍고도 무척 반가웠다.
마치 소꿉친구 혜경이를 만난 것 같았다. 혜경이와는 결혼 후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어느 날 다른 친구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딸 하나 낳고 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후로 혜경이랑은 가끔 통화하고 지냈었다. 그때 혜경이는 공부 잘하는 중학생 딸 뒷바라지에 올인하고 있었다.
혜경이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어릴 때 이쁜 얼굴이 지금도 남아 있네. 하나도 안 늙었어"
하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를 향해 기분 좋은 립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혜경이 엄마는 올해 87세, 귀가 잘 안 들리고 주름살과 검버섯이 핀 것 말고는 피부가 여전히 고왔다.
"엄마가 피부 고우시다고 늘 그랬는데 어쩜, 여전히 고우시네요." 나는 립서비스가 아닌 사실을 큰 소리로 얘기했다.
혜경이 엄마는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린다면서도 곱다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으시곤 해맑게 웃으셨다.
혜경이 엄마는 툇마루에 앉아서 너른 들판을 보다가 햇빛 보라고 내놓은 다육이며 마당가 화단을 둘러보셨다. 그러면서 우리 집 풍경을 세세하게 떠올리셨다.
"한 번은 고추밭 매다 하도 목이 말라 샘으로 물 뜨러 왔는데 앞마당이 다 꽃으로 환하더라고. 주먹만 한 함박꽃이며 모란이랑 작약이 탐스럽게 피고 이름도 모르는 꽃들이 얼마나 많이 피어 있던지.
그 후로도 종종 와 꽃구경도 하고 아줌마랑 토방에 앉아 야그야그하다 가곤 였어.
그리고 본 게 자네도 영판 엄마를 닮았구먼. 빈 집에다 요렇게 꽃나무 심고 꽃씨 뿌리는 걸 본 게."
혜경이 엄마한테 그런 기억이 있는 줄 첨 알았다. 엄마는 유독 꽃을 좋아했다. 농사일에 쫓기면서도 철철이 마당 가득 꽃을 심었고 땡볕에 호미로 찍어 논 쇠비름풀이 죽지도 않는다며 푸념하면서도 그 쇠비름꽃마저도 이쁘다고 했다.
혜경 엄마는 중얼중얼 혼잣말하다가도 기분이 좋은지
혜경이는 몸이 약해 시골에 잘 안 오는데 작년 설에는 딸 데리고 다녀갔다며 묻지도 않은 이런저런 얘기를 실타래를 풀 듯 풀어놓으셨다.
지금은 혜경이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몇 년 전엔 혜경이 아버지까지 먼저 떠나 지금은 귀농한 큰아들 내외랑 손자들이랑 함께 사시단다.
" 딸이 숭근 꽃도 보고 좀 오래 살지, 아짐은 뭣이 그리 급해서 빨리 가겠을까이"
혜경이 엄마는 자리 털고 일어나 보행기를 밀고 가면서도 자꾸 엄마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는 시골에 혼자 살다 침대에서 떨어져 고관절이 골절 돼 수술한 후 서울로 모셔 와 치료받던 중 패렴이 악화돼 오신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엄마가 가신지 올해로 6년 째다. 엄마를 갑작스레 떠나보내고 나는 엄마가 그리울 때면 빈 집에 내려와 며칠씩 있다 가곤 한다.
어쩌면 혜경이 엄마는 엄마를 많이 닮아 엄마처럼 늙어가는 나를 보면서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더 나셨나 보다.
한 낮이 되자 봄볕이 정수리에 쏟아진다. 3월인데 화창한 시골의 햇빛은 오뉴월 햇볕 같다. 혜경이 엄마랑 앉아 쉬는 사이 물 준 부추씨 밭이 금세 다 말랐다.
생땅을 겨우 파서 흙덩이를 부수고 부추씨를 뿌렸는데 싹이 날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비라도 좀 와 주면 좋은데, 주간 날씨 예보에 당분간 비 소식은 없다. 집에 있는 동안이라도 물을 더 챙겨줄 수밖에.
씨앗을 들이고 나니 허리도 뻐근하고 손목도 손가락도 아프다. 그럴수록 마음이 더 간절하다.
부디 흙 속에 숨어 있을 풀씨보다 애써 심고 뿌린 꽃씨, 채소 씨앗들이 먼저 눈 뜨고 일어나 벌이야 나비야 아우성치며 새파랗게 올라와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