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15분간

이러쿵저러쿵

by 장명흔

시골에 내려와 사흘을 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영광에서 서울 가는 우등 고속버스 9시 50분 차다. 한 달에 한두 번 시골집에 다녀갈 때마다 이 시간 버스표를 예매한다. 영광에서 서울까지는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니 이 차를 타면 집에 도착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좋다.

탈 때마다 느끼지만 이 시간 버스는 빈 좌석이 없다. 항상 좌석도 화물고도 만석이다. 출발 5분 전, 버스 기사는 통로를 돌아다니며 좌석을 확인한다. ​

"엄니 아부지들, 마스크 날개 쫙 펴 써 주시고 안전벨트 꼭 매셔요이." 나도 벨트를 매며 혼자 빙그레 웃는다. 버스기사의 말이 정겹다.

고향 말은 터미널에서부터 시작되고 터미널에서 끝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차 안 여기저기서 딸깍, 딸깍 벨트 버클 채우는 소리가 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버스가 영광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뒤로한 채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는다. 이어폰으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시골집에서의 사흘 간을 떠올린다.



술보다 좋아하셨던 커피를 아침마다 부모님 산소에 끓여다 드리고 산소에서 놀다 온 일, 텃밭에 풀을 뽑다 흙 속에서 튀어나온 청개구리, 도마뱀에 놀라 뒤로 나자빠진 일, 길냥이 밥그릇에 사료 부어주고 봄이가 언제 오나 기다리던 일, 지난가을 전지해준 홍매화, 청매화나무마다 희고 붉은 꽃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먼 훗날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 이 풍경을 떠올리면 어느 봄날 중 하루가 낡아가는 우리 집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일 거라 꿈꾸는 동안 버스는 정안휴게소에 정차했다.

휴식 시간은 15분이란다. 봄날 휴게소는 차와 사람들로 봇물 터진 듯했고 나는 잰걸음으로 화장실만 다녀왔다.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다녀오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사흘 간의 노동에 종아리도 땡땡하고 온몸이 물 먹은 솜뭉치 같다. 봄 햇빛이 차창 밖에서 신기루처럼 퍼지며 눈이 부셨다.

버스 기사는 버스에 타자마자 다시 인원수를 체크한다.

엄니 아부지, 내 젙엣 사람 다 왔는지 한번 봐 주시오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쪽에 앉은 할머니가 그런다.


"아직 한 사람 안 왔는디요. 오메, 쩌기 저 분홍 셰타 입은 아줌만디 뭣하고 인자사 화장실로 간디야." 그 말에

버스 안 승객들 시선이 일제히 분홍 아줌마한테로 향했다.

버스 기사는 문 앞에 서서 인파 속 화장실로 뛰어가는 분홍 아줌마를 보며 주절주절 말이 길어진다.


"오메, 저 양반 때문에 늦게 출발혀야 겄네. 5분 늦게 출발하면 서울에 15분 늦게 도착 허는데. 여그서 식사할 시간은 안 되는디, 정 시장하믄 간단하게 입가심만 허고 와야제. 저 양반은 차분히 식사까지 허셨는가 보네." 버스 안 사람들은 화도 내지 않는 기사 눈치를 보며 뭐라 뭐라고들 사방에서 술렁거렸다.

잠시 후 예순 후반쯤 돼 보이는 분홍아줌마가 숨을 헐떡이며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분홍아줌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으면서 너무나 태연스럽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나라면 아마 고개도 못 들고 쥐구멍 찾아들어가 듯 내 자리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기사님은 여전히 웃는 낯빛으로 분홍아줌마에게 딱 한 마디 했다.

"이 양반들이 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당게요." 자리에 앉은 분홍아줌마는 웃어 싸며 한마디 했다.

"당뇨약 먹어야 해서 식당 가서 아침 먹었당게요."

칸에 탄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한마디 했다.

"뛰느라 애썼은 게 박수쳐 좀 쳐줍시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로 얼굴 붉히고 불편해질 뻔한 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 버스기사도 승객도 분홍아줌마도 어쩜 다들 저럴 수 있지.

버스기사는 그렇게 늦게 오면 어떡하냐고도 하지 않았고, 식당에서 밥까지 먹고 온 분홍아줌마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고 그런 아줌마에게 누구 하나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우리 고향말로 참 뭐시기하고 거시기했다.

영광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안 다시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꿈을 꾼다.

버스에 형제자매들, 엄마 아버지 다 타고 벚꽃놀이 떠나는 관광버스였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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