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덕꾸덕 마른 굴비를 방망이로 두드려 부드럽게 한 뒤 뼈를 다 발라내고 찢어서 내 온 것이다. 물에 만 밥을 한 숟가락 떠서 그 위에 굴비 한 점을 얹어 오물오물 씹으니, 그 옛날 어머니가 한여름 점심상에 올려주셨던 바로 그 맛이었다. 술기운에 열이 올랐던 몸과 마음은 찬 녹찻물에 만 찬밥, 그리고 그 위에 얹은 굴비 한 점에 금세 ‘쿨’해졌다." -본문 중에서.
바다와 물고기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해양학자가 있다.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부키. 2013)의 저자 황선도 박사다. 저자는 30년간 우리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연구해 '물고기 박사'로 불린다. 이 책은 우리가 철철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명태, 고등어, 멸치 등 16종 바닷물고기에 대한 첫 보고서다.
책은 목차만 훑어보아도 익숙한 제 철 물고기들을 한눈에 꿸 수 있다. 1월 명태, 2월 아귀, 4월 조기, 5월 멸치, 7월 복어, 9월 갈치, 등 우리가 먹지만 잘 모르는 물고기를 열두 달로 나눠 궁금증을 재미있게 풀어준다. 그중 넙치와 가자미에 관한 이야기다. 눈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넙치나 가자미 모두 갓 부화한 새끼일 때는 다른 물고기와 같이 눈이 양쪽에 하나씩 붙어 있다. 그러나 3주 정도 지나 몸길이가 10밀리미터 정도로 성장하면 눈이 이동하는 변태를 하게 된다. 넙치 종류는 오른쪽에 있던 눈이 왼쪽 눈 옆으로 이동하고, 가자미 종류는 반대로 왼쪽 눈이 오른쪽 눈 옆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물 밑바닥에 바짝 붙어서 저서 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눈의 위치뿐만 아니라 몸 색깔도 달라져 등 색깔이 주변의 모래나 진흙과 같은 색으로 바뀐다. "(120쪽)
입담 좋은 저자의 바닷물고기 사랑은 넘친다. 고등어는 왜 등이 푸를까. 흔하던 명태는 왜 더 이상 잡히지 않을까? 뱀장어는 왜 회로 먹지 않을까? 자연산 복어에는 독이 있는데, 왜 양식한 복어에는 독이 없을까? 밥상에서, 바닷가에서, 횟집에서, 생선을 먹을 때면 한 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어 보았을 법하다.
저자에 따르면 멸치도 나이를 먹는데 그걸 알아보는 방법은 귀속에 들어있는 이석을 통해서다. 이석은 칼슘과 단백질이 주성분으로 이루어진 뼈 같은 물체로 몸의 균형을 감지하는 평형기관 구실을 한다. 이 이석을 쪼개거나 갈아서 단면을 보면 나무의 나이테 같은 무늬가 있어 나이를 알아낼 수 있다.
몇 살 먹었는지, 심지어는 몇 년, 며칠에 태어났는지를 알려 주는 일일 성장선도 찾아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석에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살아온 여러 정보가 기록되어 있어 물고기의 숨겨진 비밀을 캐낼 수 있다니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 새삼 느끼게 해 준다.
"2006년 여수에 있는 남해수산연구소에 근무할 때이다. 한국방송 창원방송총국에서 남해의 대표 어종인 멸치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서 촬영한 영상 중에 갈치가 멸치를 잡아먹는 장면이 있는데, 표층에 떠다니는 멸치 떼 아래에 갈치가 ‘칼’같이 서서 낚아채듯 잡아먹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기했다."(171쪽)
9월이 제철인 갈치의 이런 습성 때문에 일본에서는 '서 있는 물고기'라고도 부른단다. 갈치를 잡을 때는 미끼로 갈치를 써 다른 갈치를 낚는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다.
책은 과학자의 눈으로 물고기의 생태는 물론 이름에 담긴 유래와 관련 속담, 맛있게 먹는 법, 매일 파도에 뱃머리로 정신 잃은 얘기, 뱀장어를 조사하다 소주 생각 나 마신 얘기, 어민들에게 대접받은 민어회 갈치속젖에 회포 푼 일화 등 조사현장에서 겪은 일들을 맛깔나게 들려준다.
책은 현대판 <자산어보>라고 할 수 있으며 해양 생태계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입문서가 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