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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Nov 15. 2023

북리뷰- 있어 보이지 않아서 더 좋은 시

"세월에 떠밀려 요양원에 계신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돌아가신 게 아니라 도망간 거였던 어머니, 엄마 없이 자라 엄마가 된 여동생, 나보다 더 장남 같은 내 의붓동생. 그리고 나를 알지 못하는 이부동생과 어린 시절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나를 키워준 친척분들께 이 시집을 바칩니다 뒤돌아 보니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그 아픔마저도 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시인의 말) "

오랜만에 시집 한 권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을 접했다. 최진영 시인의 첫 시집이다. 127쪽에 담긴 시 80 편은  사람,  사랑, 일,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로 소설처럼 묵직하다.

시에 담긴 그의 치열한 삶, 시에 대한 태도는 첫 시부터 진지하고 절실하다. 절실한 만큼 민낯을 보이는 것도 주저 하지 않는다. 진솔함은 때론 불편함을 수반하기에 시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이쪽 저쪽 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걸.​

"구직란/뭐든지 다 하겠습니다//식혀만 주십시오!/제 열정을... 제발 뽑아주세요!!!!!!!!!! 일하고 싶습니다.(구직 사이트 부분, 11쪽)

"노약자석에 앉은 사람은 아무리 봐도 NO약자 같고/어떤 학생은 이어폰 밖으로 음악이 비집고 나오게 만들어//버스나 지하철 안을 클럽으로 만들지(노이즈 캔슬링 부분, 60쪽)

이 시에서 저 시로 넘어가는 사이가 깊고 넓어 우두망찰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지향하는 시는 있어 보이지 않아서 더 있어 보이는 시라고 하면 틀린 말일까. 시인 자신이면서 나, 우리 얘기가 분칠 하지 않는 민낯으로 다가온다.

"소위 있어 보이는 시를 쓰려고/생경한 비유나 문자를 의미 없이 붙이느라//나는 얼마나 시를 잊고 살았나/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분칠을 하고 곤지까지 찍어가며..., (좋은 시 부분. 25쪽)

"이건 시고 저건 시가 아니야?/은유가 있어야 시고 없으면 시가 아니라고?..., 등단해야만 시인이야?/시골에 꽃 같은 아이들이나 장수한 노인의 입에서 쏟아지는 진리는 시가 안되나?/알아듣지도 못할 시를 쓰면서 시인이야?//뭐가 시야?(시 부분, 18쪽)

시를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다가오면서 시인은 시의 마음이 이런 거라고 귀띔해 주는 듯하다.​

".., 동생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러//엄마 없이 자란 네가 엄마가 되었구나(평내호평역 부분. 34쪽) "

"당신의 발소리만 듣고도/당신을 알아봐 주는 존재는//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반려동물전문, 99)

특히 한때 근무했던 병원에서의 마주한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일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오롯한 모습이 보인다.

" 병원엔/아파도 웃는 사람//아프지 않은데 우는 사람/ 죽고 싶어 하지만 실은 살고 싶은 사람//살고 싶어 하지만 실은 죽고 싶은 사람 /병세가 악화되지만 행복한 사람//병세가 호전되지만 근심 가득한 사람 (사람, 사람, 사람 부분, 70쪽) "

"어젯밤에 응급실에 실려와/병원에 입원하신 할아버지가//이불을 무덤처럼 덮어쓰고 //숨죽여 흐느낀다//엄마..., 엄망...,를 부르시며(할아버지전문, 83쪽)

이 외에도 병원 24시 같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응급실>, 병이 재발해 더 이상 의사의 치료도 필요 없는 암환자가 입원하지 않아서 좋다며 덤덤하게 웃는 <집에 갈래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유언> 은 읽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긍정도 부정도 간과할 수 없는 막막함도 안겨 준다. 많은 시편 중 유독 병원 기록인 환자들의 이야기가 눈에 밟힌 건 일주일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 때문일까.

이 시집은 지금까지 읽은 여느 시집과는 다른 자장이  느껴 진다. 일과 삶과 시가 따로 분리되거나 미화되지 않아 좋다. 뒤돌아보니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아픔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최진영

1990년 서울 서대문 홍제동에서 태어나고 강원도 속초에서 Level up 함.

월간 '시'제3회 청년시인상 당선(2018)

주로 홍제동과 광화문에서 서식함

웹소설을 써서 먹고살고 있고

현재 PK를 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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