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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Oct 12. 2023

 그놈 때문에


"나. 새벽까지 못 잤어. 그놈 때문에."

"그놈? 그놈이 누군데?"

 

어제 전철을 타고 가면서 들은 얘기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  둘이서  나눈 대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곱상한 청년 둘이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전철 안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핸드폰에 눈이 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사위가 조용하니   일부러 귀 세우고 엿들으려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대화에 나도 껴 있는 듯  가깝게 들렸다.

 

나는 두 사람의  다음 얘기가 궁금해 두 귀를 바짝 세웠다. 그놈이 대체 누굴까. 밤새 게임을 했나. 그놈이 게임 속  버그라도 되나. 아님, 술 취한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느라? 나 혼자 이러저러한 상상을 펼치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말이야. 리포트 쓰고 나니 12시가 넘었더라고.

불 끄고 자려고 누웠어. 근데,  에서 나는 소린가 했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거야. 바로  내 침대 밑에서." 친구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침대밑? 으으..., 그래서?"

" 그래서는, 일어나 불 켜고  엎드려 침대밑을 빠꼼히 봤지"

"누구.. 였어?, "

"그놈이 누구였냐면." 친구는 다음 말을 않고 바짝 굳어 있는 옆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나도 침대밑에 숨어든 그놈의 정체가 궁금해 두 사람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 글쎄. 그놈이 누구냐면..., 바로 귀뚜라미더라고"

"그놈이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새벽 다섯 시까지 한숨도 못 잤다니까."

"에이, 뭐야. 난 또..., "

새벽까지 친구를 잠 못자게 했던 놈의 정체가 귀뚜라미라니 옆 친구는 한마디로  너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친구는 뭘 상상했을까. 나처럼 혼자 사는 여자의 원룸에 들어와 침대밑에 숨어 사는 영화 속 무서운  남자라도 상상한 것일까. 말그대로 김 샜다는 표정인 친구는 그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놈 얘기를 심각하게 이어가던 친구도 허허실실  웃는다. 귀뚜라미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데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릴  듯 말 듯 조곤조곤 이어 졌다. 청년을  잠  못들게 했던  그놈이 귀뚜라미였다니, 내가 상상하던 그놈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지 싶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은 의례 무표정해진다.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 눈을 감고 가는 사람, 전철 안에 있으면 나부터도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화석처럼 굳어지는데, 싱겁다면 싱거운 두 청년의 대화가 모처럼 생동생동하게 들렸다. 별 일 아닌 일로 웃어 좋았다. 요 며칠 자려고 누우면  창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아스라한데, 아직 귀뚜라미 소리는 못 들었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귀뚜라미 때문에 잠 설치는 청년도 다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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