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 뿌리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따며 자연속에서 일하며 산다."
책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2018>을 쓴 이옥남 할머니를 소개하는 글이다. 멋지다. 전문 농사꾼은 역시 농사 달력도 필요 없다. 때를 읽고 때를 놓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책은 강원도 양양에서 농삿일 하며 사시는 올해 아흔 일곱 되신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를 묶은 책이다.
책에 따르면 할머니는 어릴 적 아버지가 글을 못 배우게 해서 못 썼다 한다.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농사 지으며 글씨를 예쁘게 써 보고 싶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다.
열일 곱에 시집 와 딸 셋 아들 둘을 두고 농삿일 하며
30년 넘게 일기를 쓰셨다니 놀랍고 존경스럽다.
할머니의 일기는 말 그대로 농사일기다. 옥수수 심고 감자 심는 얘기, 고추 두럭 친 얘기, 도라지 캐고 깨 모종 하는 얘기, 맞춤법 띄어쓰기 개의치 않고 써 내려간 글엔 할머니만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가 읽히고 이웃 얘기, 자식들 얘기, 등 할머니의 시난고난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농사꾼에겐 흐리고 맑은 날이 따로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다음 글은 여름 비 오는 날의 풍경이다.
"오늘 아침부터 무우 두럭을 만들고 무우 씨앗을 심어 놓고는 물을 이약가로 실어다가 물을 주고는 아래 밭에 가서 익은 곳초 좀 짜고 또 강낭콩도 따가지고 와서는 배차두럭을 만들어놓고는 겨우 들어와서 저녁 먹고 밖에 나가보니 비가 오네. 친정엄마 오신대나 반갑다.
뭐든지 다 타서 말라가니 너무 애 태우다 비가 온다. 2006년8월16일 흐림"*배차:배추 (118쪽)
다음은 1997년 9월 29일에 쓰신 일기다.
"저녁 여덟 시에 바깥 가로등불을 내 손으로 껐다.* 집에 와서 생각해봐도 분한 맘에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존재 없는 사람인가. 그렇게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또다시불을 켜노니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구나. 언제나 더 무시를 안받을까.나도 남한테 하느라고 했건만 이럴때 너무 외로운 생각도 드는구나. 내가 친척이 있다면 이럴 때 의논이라도 해보지. 생각할수록 분함을 이길 수 없네. 어느 누가 알아 줄까."(1997년9월29일. 어느 누가 알아줄까. 131쪽)
어릴적 어른들로부터 가로등 켜진 논 밭의 작물들은 여물 들지 않는 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니 할머니도 마을 사람에게 가로등불을 꺼 달라고 하셨다가 거절 당한 모양이다. 당신 손으로 가로등불을 끄며 속상해 하는 그날의 심정이 몇 줄 안 되는 글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밖에도 책에는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없는데도 안부 전화 한 며느리에게 돈이 없다고 말 못 하시는 심정, 해넘이를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토로하시는가 하면 장날 장에 가서 명태, 오징어 등 삼만원어치 장 보고 돈 벌기 힘든데 돈 삼만원을 다 썼다며 넋두리 하시는 모습이 낯설지 않아 책 읽다 웃음이 나온다.
이렇듯 할머니의 일상은 소소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기 내용에 왜 마음이 쓰이는 걸까.
문득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최근에 낸 산문집<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예술가의 육필 편지집(편지로 읽는 슬픔과기쁨)을 읽은 소회를 밝힌다.
책에서 그는 편지글인 문어체의 진심에 대해 말한다. 그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반드시 특별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쓰는 이의 말투에 담긴 진심이라고.
편지글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일기도 그렇다. 굽은 손으로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 쓰셨을 일기는 한편 한편 진솔한 시다. 그것은 할머니도 모르고 있을 할머니만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꾸밈없는 촌스러움이 여가없이 스며 든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소중한 것은 소소함에 있다고.
이옥남 할머니 앞으로도 글 쓰시며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