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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Apr 13. 2023

라디오키드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 13년째다. 이곳으로 옮겨와 좋았던 건 넓어진 아파트 평수보다 주방 라디오가 있어 마음의 평수가 더 커졌다

왼쪽 상부장 바로 밑에 설치된 주방라디오는 워낙 슬림해 눈에 잘 띄지도 않아 전원 버튼을 누르고 듣고 싶은  채널의 주파수를 맞추면 시간대에 따라  팝이나 클래식을 맘대로  즐길 수 있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에도  솔깃해서 좋았다.


 티브이와는  다른 듣은 재미에 들려 뜨면 라디오부터 켜곤 한다.  라디오가 들려주는 세상 얘기를 양념 삼아  밥 하고 국 끓이고 나물을 무치는 시간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즐거웠다.

그랬던  라디오가 요즘 아프다. 올해로 13년째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가도 영영 못 듣게 될까 봐 걱정이. 짝꿍에게 한번 봐 달랬다. 짝꿍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나 보다.

전원 코드를 뽑았다 다시 켜 보기도 하고  습하거먼지가 껴서 그런지 모른다며  털고 닦아 주고 살펴봐도 소용없다. 지지직거리다 이내 끊기고 만다.


아무래도 세월 탓인가.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명이 다한 모양이다.  나한텐 산책길 같이  엽엽하고 든든한 친구였는데.

생각해 보면 나를 키운 건 라디오다. 어릴 적부터 라디오를 듣고 자랐으니  라디오키드라고 할까. 그러니 내겐 티브이 보다  라디오에 관한 기억들이 많다. 그 시절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라디오 덕분에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인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새벽마다 모닝콜처럼  켜져 날씨정보, 농사정보를 들었고  청소년기엔 카테트 테이프를 삽입해 들을 수 있는 겸용 라디오로 지금은 고인이 된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에 중독 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잠들기 전 핸드폰 앱으로 라디오를 들을 때면  그때 그 시절 아련했던  추억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솔고시 떠오르고 별밤지기 명 디제이 이종환 씨가 소개하던  올드 팝을 찾아 듣곤 한다.


별밤지기 이종환씨의  묘소


 전 일이다 살다 보면 이런 기막힌 우연도 다 있다. 일이 있어 충남 아산에 들렀었는데 이종환 씨 고향이 그쪽이고 내가  그 곳 근처에 그가  잠들어 있다는 지인 얘기를 듣고  함께 묘소를 찾았다.


그의 묘소는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 산 중턱  볕바른 곳에  있었고 생각보다 소박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 잠 들어 있는 곳에서 우리는  타임머신을 탄 듯 잠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어 산을 내려왔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기분이  참 묘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라디오는 내게 있어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이기도 하고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땐 참 열심히 쓰고 살았다.

 라디오에 소개되는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용기 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얘기를 세상 속으로 슬쩍 밀어 넣으면  어느날은 운좋게도 사연이 채택 되고 진행자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면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 며칠은 구름처럼  붕떠서 살기도 했다.


결혼 후엔 상품에 눈이 멀어  라디오도 부족해  여러 회사 사보에 무작위로 투고도 해 봤고 원고료와 소소한 상품 타는 재미가 쏠쏠하고 짜릿했다.

지금도 주방 살림살이 중 그때 받은 압력솥과  삼중냄비를 쓰고 있다. 길이 잘 들어 손에 익기도 하고  낡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날 나름 치열하게 살았던 내 삶의 징표인 것 같아 선뜻 내다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나저나 주방라디오가 고장이니 어쩐담. 창고 한번  찾아봐야겠다. 카세트라디오를 둔 것도 같다. 엄마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를 하면서 큰언니가 엄마한테 사 드렸던 카세트 라디오 퍼뜩 생각났다. 주방 라디오 같지 않아서 자리도 차지하고 한동안은 손에 익지  않아 불편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라디오 중독에 빠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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