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명흔 Apr 15. 2023

윤아샘의 캘리체 '숲'

그림책 동아리 카페에 매일 시 한 편이 올라온다. 7명의 회원들이 엄선한 시를 필사해 정한 요일에 올려놓으면  회원들은 각자 그  시를 필사하고 감상하며 하루를 연다.


오늘은 금요일, 캘리 하는 윤아샘이  박노해 시인의 시 '도토리 두 알'을 아름답게 써서 올렸다. 시도 시지만 손글씨가 삭정이 같은  나는 글씨 잘 쓰는 회원들 필체를 은근히 즐긴다. 특히  금요일 윤아샘의 시를 기다린다. 아니 윤아샘의 캘리체를 고대하고 있다는 게 맞겠다.


나는 어제도 박노해 시인의 시를 따라 읽지 못하고 그만 윤아샘의 '숲'이라는 글자에 그만 포옥 빠지고 말았다. 연두와 초록과 거기에 하늘이 적당히 얼비치는  '숲'이라는 글자나를 연두연두한  숲으로  데려다 놓았다.


숲의 1년 중 가장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접점을 이루는 그 시간을 ''이라는 글자에서 보물찾기하 듯  피어오르게 한 것이다.

 

쪽동백나무. 도르르 말린 잎이 벌레들에겐 최고의 안식처.


나는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이 즈음의 숲을 참 좋아한다.  어제도 보드라운 새 잎들을 눈에 담으며 느릿느릿 걸어서 숲을 넘어왔다. 이맘때의 숲은 두툼한 겨울 외투를 벗어던지고 가볍고 산뜻한 봄점퍼로 갈아입은 듯하다.


숲은 봄꽃이 지고 잠잠하던 나뭇가지에 햇살과 바람이 머물다 가면  나무들은 기다렸다는 듯 풀무질한다. 가지마다 새살이 차고 참새부리 같은 새순을 밀어 올린다. 갓 올라온 새 잎을  가만히 어루만지면 손 끝에 닿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아무도 모르게 숲의 정령이 다녀간 건 아닐까 생각한다. 숲의 시간이 숨 가쁘게 흐르면 잠자코 있던 미물들이 깨어난다. 숲에서 제일 미약하다 싶은 애벌레들의 고공 행진이 시작되는 시기가  이 즈음이다.

애벌레란 놈들은 어디에 꼭꼭 숨어 있다가 풋내를 맡고 굼실굼실 기어 나와 걸신들린  것처럼 연한 잎들을 먹어 치우는데, 애벌레가 지나간 잎들은 얼멍얼멍 코바늘로 레이스 뜨기를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의 나무는 조용하다. 애써 피워 올린 새 잎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알에서 깨어난 미물들을 배불리 인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애벌레에겐 진수성찬이다. 이 성찬이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에겐  진통 끝에 아기를 낳은 산모의  첫 국밥 같다 고나 할까.

숲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초록에서  먹초록으로 넘어가는 5월 말쯤 숲길을 걸으면 실컷 배를 채운 애벌레들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스파이더맨처럼 줄을 타고 지상 내려온다. 

그때가 아마 5월에서 6월로 접어들 때지. 지상으로 내려온 애벌레들은 등산객의 발길에 터져 죽고 그렇지 않은 애벌레는 지들만의 안식처에서  아름다운 나비나 나방으로  우화 할 것이다. 그즈음이면 오솔길에 국수나무 꽃이 하얗게 피고  꽃 진 자리마다 초록 잎이 짙어진다. 수북한 낙엽 사이로 각시붓꽃이 살포시 얼굴 붉히며 피어날라나.

 

숲이라는 말만으로도 웅크린 가슴이 쫙 펴지고 긴 호흡 끝에 자주 가 숲 속 식구들이 떠오른다.

 데크길에서 본 쪽동백  꽃


굴참나무에 걸린 멈춘 시계, 오래전 누군가 마당 가 연못을 돌아 등나무아래서 여여하게 서 있었을 것만 같은 숲 속  오래된 집터의  마당 정원, 산벚나무,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도토리나무.'상수리나무,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토끼처럼  숨 가쁘게 올라가 쉬다 손바가지 만들어 받아 마시는  바윗밑샘물, 그 아래 바위틈의 제비꽃, 시나브로 썩어가는 나무의자, 갈 때마다 한 번씩 안아 보거나 기대 쉬는 신갈나무, 국수나무, 때죽나무, 쪽동백나무가 사이좋게 서 있는 사잇길, 마스크와 열쇠가 걸린 나무, 딱따구리, 다람쥐, 청설모, 멧돼지, 너럭바위, 전망대,  등나무, 새로 난 숲 속 데크길...,



윤아샘의 푸른 '숲'이 끝도 갓도 없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전생에 나무였거나 어느 숲 속에 붙박인 바위였을지도 모르겠다. 숲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죽을 뚫고  새 잎을 내는 화살나무처럼 잠잠하던 식물감성이 깨어나 주절거리게 만든다.


 숲 속 수십 수백 갈래의 길들이 지닌 길의 이력과 그 길을 오르내렸을 사람들의 사연은 또 얼마나 아롱다롱할까 생각하면  방 안에 앉아서도 피톤치드 가득한 숲 속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누구는 지치고 힘들 때 찾아와 숲에 기댈 것이고, 또 누구는 먼 길을 돌아 소풍 오듯 배낭 메고 숲 속 길 따라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갈 것이며, 또 또 누군가는 늙어 가는 육신을 위해 숨 한번 크게 쉬려고도 숲을 찾을 것이다.


숲은 늘 거기 있다. 늘 거기 있으면서 오는 사람 품어 주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슬프고 외로운 사람, 질투와 욕심 많은 사람''이 사람 저 사람 가리거나 저울질 않고 누구든 팔 벌려 품어 주는 성자 같은 숲.


숲이라는 글자에 취해 있는 사이  도토리 두 알이  눈에 들어왔다. 시인의 숲에도 도토리나무가 살고 있어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 두 알이 시인의 눈에 띄었나 보다. 도토리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떤  생각에 빠졌을 시인의 숲은 어디일까.

세상 많고 많시편 중 이 시를 고른 윤아샘의 숲과 저마다  이 시를 다감하게 필사하고 을 책모모 샘들의 숲은 또 어떤 빛일까 몹시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자주 걷는 국수나무길

 

작가의 이전글 라디오키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