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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Apr 26. 2023

04   나희덕 시인의 '초승달 '


초승달


나희덕 시인

 

오스트리아 마을에서

그곳 시인들과 저녁을 먹고

보리수 곁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준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산맥 위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 저편에 내가 두고 온  세계가 환히 보였다

 

그 후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있다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

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

 

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처럼.

 

곽재구의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95~96쪽의 詩



달빛  한번 보라고 어깨에 따뜻한 손을 얹어주는 이의 마음은 목련이 피었다고 전화해 주는 이의 마음과 닮지 않았을까.


 달밤은 어렸을 적에만 살았던 달토끼 생각이 난다. ​

여름밤의 달도 좋았지만 엄마의 무릎베개를 베고 누우면 밤하늘을 수놓은 까무룩한 별들이 부러웠다. 인간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이상향 같아서다. 그땐 별도 달도 포근하고 아늑했다. 살짜리  여자 아이의 가당치 않는 상상력 덕분 이었으리라.

 숙이는 어느 하늘 아래서  살고 있을까! 달밤 하면  여고 때 친구였던 숙이 생각이 달빛처럼 번진다. 이웃동네에 살았던 친구는 보름달이 환한 추석날 밤 ​나를 찾아왔었다. 말만 옆 동네지 친구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도 2,30분은 족히 들어가 야 하는 곳이다. 기억에 의하면 그때 친구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 며칠 안 돼 슬픔이 눈꺼풀에서 채 떨어지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 밤에 무섬증도 뒤로한 채 숲길을 걸어왔을 친구를 생각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우린 집 앞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 언덕으로 올라갔다. 친구는 많이 아픈 엄마가 일만 하다 갑자기 가셔 불쌍하다며 울먹였고, 나는 그런 친구 곁에  앉아 있을 뿐 어떤 위로의 말도 못 하고 엄마를 잃은 친구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하며 그냥 친구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나도 울컥울컥 했는데 달밤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환한 보름달 아래, 우리 말없이  달을 쳐다 보며 오래 앉아 있었고 밤이슬 내리는 가을밤 들풀냄새, 풀벌레소리가 코와 귀를 흥건히 적셨다.

여고를 졸업하고 나는 나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다른 길을 갔다. 가끔 달을 보면 말수 없고 암전 했던 친구 생각이 난다.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도 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면  오늘도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겠지.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다. 달은 시인에겐 저편의 낯선 설렘이지만 내겐  늙지 않은 숙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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