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근사하고 멋진 주인공들을 만난다. 현실에서 보기 드문 존경할만한 어른들도 참 많다. 등장인물 중에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기도 하고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순간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멀리 여행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쓰레기로 뒤덮인 냄새나는 지하철 구석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든 청소부 모스 아저씨 <지하정원>, 동물들의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살피고 읽어주는 동물원지기 아모스 할아버지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 혼자 남겨질 어린 손자에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선물해주고 떠난 돼지 할머니 <할머니가 남긴 선물>....,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책 속에는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도 살고 있다.
이 책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도 내 눈에 띈 멋진 주인공 중 하나다. 투우의 나라 스페인에서 싸움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한 꽃좋아하고 코르크나무 언덕을 좋아하는 감성파 소 페르디난드 이야기다.
지역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8년째 유치원 아이들과 그림책 수업을 하고 있다.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아이들 중에 더러는 나처럼 등장인물에 동화 돼 거기에 자기 마음을 얹곤 한다.
그럴 때 슬쩍 아이들 마음을 건드려 주면 한 통의 편지가 되기도 한다. 예닐곱 아이들이 쓰는 편지가 기껏해야 한두 줄 길면 세네 줄 정도이지만 마음을 전하는데 편지의 형식과 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삐뚤빼뚤한 글씨, 때때로 아이가 하는 말을 대신 받아 써 주는 그 정도의 편지에도 마음이 물컹하고 말랑말랑 해지는 순간은 아이 들게도 내게도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이 편지는 도서관 그림책 동아리에서 읽을 그림책 작가 '주디스 커' 책을 찾다가 책장 구석에서 보물처럼 발견한 책을 읽고 즉흥적으로 한 독후활동?이다. 이 책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가반가움에 그만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읽어버렸다. 나와는 다른 주인공 페르디난드가 너무 멋져 아이 마음으로 써 본 편지이다.
** 뚱딴지처럼 딴짓하느라그림책 동아리에서 공부할주디스 커 그림책을 찾긴 했지만 찬찬한 공부를 해가지 못했다. 늦게나마 <주디스 커>를이 달의 작가로 선정하신 주디스 홍 작가님께 미안한마음을 흘린다.
안녕. 페르디난드.
먼로 아저씨가 들려주는 네 얘기 잘 들었어. 투우장에 나갈
싸움소가 꽃을 좋아한다고? 넌 참 특이한 취향을 가졌 더구나. 나도 꽃을 무지 좋아해. 그래서 네 얘기가 더 솔깃하게 와닿았나 봐. 어쩌면 넌 지금 이 순간에도 꽃향기를 좇아 들판을 누비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페르디난드. 넌 어쩌다 그렇게 꽃이 좋아진 거야?
다른 형제들은 투우장에 뽑혀 가려고 매일 훈련하고 있던데 넌 가만히 앉아 꽃향기만 맡고 있으니 너를 걱정하는 엄마를 봤어. 엄마 눈에 네가 훈련하기 싫어 딴청 피우는 걸로 보여 혼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네 엄마는 지혜롭고 참 따뜻한 분이더구나.
형제들과 다른 너를 비교하지도 않고, 외려 꽃향기 맡느라 늘 혼자 있는 네가 외로워질까 봐 걱정하시더라고. 너를 참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
그나저나 어떡하니. 벌에 쏘인 궁둥이는 좀 괜찮니? 네가 그 고약한 뒝벌 때문에 투우소로 뽑히게 되다니. 얼마나 아팠으면 얌전한 네가 콧김을 내뿜으며 미친 소처럼 박치기를 하고 땅을 박박 긁어대며 방방 뛰었겠어.
하필이면 그때에 힘센 싸움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날 게 뭐람. 전후 사정을 모르는 그 사람들 눈엔 그런 네가 충분히 멋지게 싸울 힘센 소로 보였을 거야.
세상은 참, 그래. 우리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같아. 꽃을 좋아하는 페르디난드가 투우장에 나가 창 든 투우사와 맞서 싸우게 될 줄 누가감히 짐작이나 했겠니.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지.
페르디난드. 강제로 수레에 태워져 투우장으로 갈 때 심정이 어땠어? 어쩜 네가 좋아하는 꽃을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비극적 순간이었잖아. 나 같으면 그 순간 무서워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거야.
투우장에 끌려간 너는 개미처럼 작아 보였고 너를에워싼 군중들의 함성은 천둥번개소리처럼 들렸어. 창과 작살을 든 무서운 투우사들이 너를 향해 달려갈 때 나는 그만 눈을 감았어.
언젠가 티브이에서 봤거든. 네 나라에서는 투우가 역사와 전통이 깃든 훌륭한문화유산이라 소개하며 광활한 투우장에서 장렬하게 싸웠지만 투우사의 창에 맞아 피 흘리며 고꾸라진 싸움소를.
그래서 더 무서웠어. 게다가 넌 한 번도 싸움이란 걸 해 본 적도 없잖아. 그들은 네가 싸움보다 꽃을 좋아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라는 걸 상상조차 못 했을 거야. 페르디난드. 넌 그 상황에서도 아가씨들 머리에 꽂힌 꽃이 눈에 들어왔다니.
그걸 본군중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거야. 네가 여느 싸움소처럼 무섭게 싸울 거라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콧김도 뿜지 않고 머리를 들이받지도 않고, 이리저리 뿔을 휘두르지도 않고 꽃 향기 나는 쪽으로 돌아 앉아 있었으니 너를 보는 투우사들은 또 어땠을까.
그날 구름 떼처럼 모인 사람들은 너를 겁쟁이라고 놀려 댔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의 그런 결단이 놀랍고도 멋졌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거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싸우기를 종용하는 군중들의 압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너를 숨죽이고 지켜봤어.
페르디난드. 넌 참 멋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네가 그 살벌한 투우장을 무사히 나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돼서 말이야.
페르디난드! 너를 보면서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살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몇 배 더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넌 변함없이 꽃을 좋아하면서 살아가겠지. 그런 너의 삶을 응원할게.
아, 참 페르디난드! 궁금한 게 있어. 네가 자주 가는 코르크나무 언덕에는 무슨 꽃이 피는 거야?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너랑 함께 코르크나무 그늘에 앉아 꽃구경도 하고 네가 좋아하는 꽃향기에도 취해 보고도 싶어.
페르디난드. 너 또 거기 가 있는 거 아냐? 코르크나무 언덕 말이야. 나무 그늘에 앉아 꽃향기에 취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너를 상상하면 나도 막 기분이 좋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