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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Jun 20. 2023

02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에게

그림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근사하고 멋진 주인공들을  만난다. 현실에서 보기 드문 존경할만한 어른들도 참 많다. 등장인물 중에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기도 하고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순간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멀리 여행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쓰레기로 뒤덮인 냄새나는 지하철 구석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든 청소부 모스 아저씨 <지하정원>, 동물들의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살피고 읽어주는 동물원지기 아모스 할아버지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 혼자 남겨질 어린 손자에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선물해 주고 떠난 돼지 할머니 <할머니가 남긴 선물>....,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지만,  책 속에는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도 살고 있다.


이 책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도 내 눈에 띈 멋진 주인공 중 하나다. 투우의 나라 스페인에서 싸움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한 꽃 좋아하고  코르크나무 언덕을 좋아하는 감성파 소 페르디난드 이야기다.

지역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8년째  유치원 아이들과 그림책 수업을 하고  있다.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아이들 중에 더러는 나처럼  등장인물에 동화 돼 거기에 자기 마음을 얹곤 한다.


그럴 때 슬쩍 아이들 마음을 건드려 주면 한 통의 편지가 되기도 한다. 예닐곱 아이들이 쓰는 편지가 기껏해야 한두 줄 길면 세네 줄 정도이지만 마음을 전하는데 편지의 형식과 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삐뚤빼뚤한 글씨, 때때로 아이가 하는 말을 대신 받아 써 주는 그 정도의 편지에도 마음이 물컹하고 말랑말랑 해지는 순간은  아이 들게도 내게도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이 편지는 도서관 그림책 동아리에서 읽을 그림책 작가 '주디스 커' 책을 찾다가 책장 구석에서 보물처럼  발견한 책을 읽고 즉흥적으로 한 독후활동?이다. 이 책이  있 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반가움에 그만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읽어버렸. 나와는 다른 주인공 페르디난드가 너무 멋져 아이 마음으로 써 본 편지이다.


 **  뚱딴지처럼 딴짓하느라 그림책 동아리에서 공부할 주디스 커 그림책을 찾긴 했지만 찬찬한 공부를 해가 못했다. 늦게나마 <주디스 커>를  이 달의 작가로  선정하신 주디스 홍 작가님께 미안한 마음을 흘린다.





안녕. 페르디난드.

먼로 아저씨가 들려주는 네 얘기 잘 들었어. 투우장에 나갈

싸움소가 꽃을 좋아한다고? 넌 참 특이한 취향을 가졌 더구나. 나도 꽃을 무지 좋아해. 그래서 네 얘기가 더 솔깃하게 와닿았나 봐. 어쩌면 넌 지금 이 순간에도 꽃향기를 좇아 들판을 누비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페르디난드. 넌 어쩌다 그렇게 꽃이 좋아진 거야?



다른 형제들은 투우장에 뽑혀 가려고 매일 훈련하고 있던데  넌 가만히 앉아 꽃향기만 맡고 있으니 너를 걱정하는 엄마를 봤어. 엄마 눈에 네가 훈련하기 싫어 딴청 피우는 걸로 보여 혼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네 엄마는 지혜롭고 참 따뜻한 분이더구나.


형제들과 다른 너를 비교하지도 않고, 외려 꽃향기 맡느라 늘 혼자 있는 네가 외로워질까 봐 걱정하시더라고. 너를 참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


그나저나 어떡하니. 벌에 쏘인 궁둥이는 좀 괜찮니? 네가 그 고약한 뒝벌 때문에 투우소로 뽑히게 되다니. 얼마나 아팠으면 얌전한 네가 콧김을 내뿜으며 미친 소처럼 박치기를 하고 땅을 박박  긁어대며 방방 뛰었겠어.


하필이면 그때에 힘센 싸움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날 게 뭐람. 전후 사정을 모르는 그 사람들 눈엔 그런 네가 충분히 멋지게 싸울 힘센 소로 보였을 거야.


 세상은 참, 그래. 우리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같아. 꽃을 좋아하는 페르디난드가 투우장에 나가 창 든 투우사와 맞서  싸우게 될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니.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지.


페르디난드. 강제로 수레에 태워져 투우장으로 갈 때 심정이 어땠어? 어쩜 네가 좋아하는 꽃을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비극적 순간이었잖아. 나 같으면 그 순간 무서워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거야.


 투우장에 끌려간 너는 개미처럼 작아 보였고 너를  에워싼 군중들의 함성은 천둥번개소리처럼 들렸어. 창과 작살을 든 무서운 투우사들이 너를 향해 달려갈 때 나는 그만 눈을 감았어.


 언젠가 티브이에서 봤거든. 네 나라에서는 투우가 역사와 전통이 깃든 훌륭한 문화유산이라 소개하며 광활한 투우장에서 장렬하게 싸웠지만 투우사의 창에 맞아 피 흘리며 고꾸라진 싸움소를.


 그래서 더 무서웠어. 게다가 넌 한 번도 싸움이란 걸 해 본 적도 없잖아. 그들은 네가 싸움보다 꽃을 좋아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라는 걸 상상조차 못 했을 거야. 페르디난드. 넌 그 상황에서도 아가씨들 머리에 꽂힌 꽃이 눈에 들어왔다니.


그걸 본 군중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거야. 네가 여느 싸움소처럼 무섭게 싸울 거라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콧김도 뿜지 않고 머리를 들이받지도 않고, 이리저리 뿔을 휘두르지도 않고 꽃 향기 나는 쪽으로 돌아 앉아 있었으니  너를 보는 투우사들은 또 어땠을까.


 그날 구름 떼처럼 모인 사람들은 너를 겁쟁이라고 놀려 댔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의 그런 결단이 놀랍고도 멋졌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거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싸우기를 종용하는 군중들의 압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너를 숨죽이고 지켜봤어.


페르디난드. 넌 참 멋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네가 그 살벌한 투우장을 무사히 나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돼서 말이야.


페르디난드! 너를 보면서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살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몇 배 더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넌 변함없이 꽃을 좋아하면서 살아가겠지. 그런 너의 삶을 응원할게.


아, 참 페르디난드! 궁금한 게 있어. 네가  자주 가는 코르크나무 언덕에는 무슨 꽃이 피는 거야?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너랑 함께 코르크나무 그늘에 앉아 꽃구경도 하고 네가 좋아하는 꽃향기에도 취해 보고도 싶어.


페르디난드. 너 또 거기 가 있는 거 아냐? 코르크나무 언덕 말이야. 나무 그늘에 앉아 꽃향기에 취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너를 상상하면 나도 막 기분이 좋아져.


 페르디난드, 네 덕분에 참 오랜만에 편지란 걸 써 봤어.

 읽어줘서 고마워. 너한테 할 말을 이만큼이나 하고도

또 수다 떨고 싶어 지니. 나 너한테 반한 거야?

여하튼 반가웠어. 아쉽지만 이만 쓸게.

안녕! 페르디난드. 영원히 행복하렴.


그림책 책장에서 발견한 보물같은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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