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널브러진 그림책을 정리한다. 센터 아이들에게 읽어 주고 읽어주려한 책들이 어지럽다. 그 중 저녁이면 따뜻한 바닥에 엎드려 뒹굴뒹굴, 구들링 하며 보고 있던 책이 제님 작가의 <그림책의 책>이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 에세이 <그림책 탱고>에 이어 그녀가 그림책으로 아이를 키우고 그림책 사랑에 빠져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한 15년 간의 기록인 그림책 수첩에서 100개의 주제에 맞는 그림책을 가려 뽑아 이 한 권에 담았다.
이 책 총 여섯 개의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가면 그림책과 관련한 정보들이 컬러로 실려 있다. 도서관 큐레이션 현장 사진을 만날 수 있고 아이를 위한 그림책부터 동화, 청소년 책, 성인들을 위한 단행본 소개까지 갈피 갈피마다 살뜰하고 생동감 넘치는 책들의 대 향연이 펼쳐진다.
그림책을 즐겨 보는 내게도 반가운 책이다. 지금은 성년이 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 그림책을 만났고, 그림책이 궁금해 그림책 공부를 했고, 도서관에서 그림책으로 봉사를 하고, 그림책을 곁에 두고 보지만, 세상에 모래알처럼 많은 그림책을 100개의 주제로 아우를 생각을 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가는 사교육 없이 그림책으로 아이를 키우고 그림책으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 가는 책 서문 첫 문장이 생각난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에게 그림책 한 권 읽어준 것이 제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은 소중한 씨앗이 될 줄 어찌 알았 을까요?"
560쪽의 목침 같은 책엔 그림책과 더불어 풀꽃을 좋아하고 산책을 즐기는 다정다감한 제님 작가의 따뜻한 글과 목소리 가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반갑고 기분 좋았던 건 내가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앞으로 읽으려고 메모해 논 책들이 갈피 갈피에 숨은 그림처럼 들어 있어서다.
가끔 어떤 책을 읽다 보면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작가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어떤 사소함이 일치할 때 전율을 느끼곤 하는 순간이 있다. 아마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 꼭지의 북칼럼에서 작가도 나처럼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제목에 끌려 읽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가 책에 소개한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을 손에 넣고 읽으며 가보지 않은 밀라노 한적한 도시의 코르시아 서점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봤다는 작가의 얘기에 약간의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보리에서 출간한 식물 책 <풀 나들이 도감> 속 '그령'이란 풀이름을 들려주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빛을 반짝이며 혼자 벙그레 웃기도 했다. 산골 아이였던 작가의 추억 속에도 그령이 자라고 있었고, 그때 어린 나를 풀가닥 덫에 걸려 넘어지게 했던 그때는 몰랐던 풀이름이 신기하게도 '그령'이었다는 것, 그 이름을 반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는 기분 좋은 시시콜콜함이 싫지 않았고, 저 도감을 펼치면 이제껏 이름을 몰라 함부로 이름 없는 풀꽃이라 부르던 것들이 앞다퉈 나오며' 나도 이름 있어' 하며 우르르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난만한 상상을 솔고시 하게 됨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주제마다 풍성하게 꾸린 북 꾸러미다. 꾸러미 안에는 무수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마음결을 통해 다르면서 같은 맛을 낸다. 누구나 즐겨 먹는 라면이 나오는 그림책이 이렇게도 많다는 것, 사람들의 안식처인 집이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김치 그림책, 월화수목금토일, 요일에 대한 그림책, 등 기발하고 좀체 끊어질 것 같잖은 무궁무궁진 얘기를 품은 북꾸러미는 작가의 15년 그림책 내공이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과학 이야기도 과학 그림책을 통해 들려주면 흥미로워진다.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북극여우와 사막 여우가 한 가족이었다는 얘기를 통해 '진화'를 상상케 한다든지, 땅에 떨어진 씨앗 열 개의 변화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그 속에 담긴 삶과 죽음 까지를 얘기 하면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책 한 권에 어른들의 삶도 고스란하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
책 말미엔 이제까지 소개한 책 1300여 권이 찾아보기 쉽게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그림책을 아직 접하지 않은 이에겐 그림책의 흥미를 안겨 줄 것이고, 그림책을 좀 봤다는 이에게는 신선한 자극과 함께 그림책 다르게 읽기를 시도해 보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소개를 하고 보니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쓰고 보니 순전히 개인적인 독후 감상문이 됐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나한테는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다시 궁금한 그림책이 생기면 사전에서 단어를 찾듯 이 책을 톺아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이 주인이고 책은 읽는 이가 주인'이 듯 나도 나만의 그림책 수첩 하나를 만들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