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를 아우르는 다양성
어느덧 뉴욕을 여행한 지도 두 달이 지났습니다.
화려함에 뒤섞여 뉴욕 거리를 활보하던 때가 고작 두 달 전이라니. 사실 믿기지 않는데요.
뉴욕에 간 적이 없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한국인만 있는 한국에 22년을 산 덕분(?)에 제 주변을 감싼 사람들이 온통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놀랍지도 않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한국에 오면 굉장히 낯설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모두가 다 똑같은 이곳에 금세 적응해 버렸습니다.
미국은 한국과는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 그중 가장 다른 게 아마 다양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양한 생김새, 머리 색, 체형, 성향이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거리를 걷는 것을 볼 때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이 가장 그러했고요.
다른 도시들은 백인들이 주류 문화를 이루고,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들이 뒤따르는 느낌이라면 뉴욕은 그냥 다양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특정한 나라라고 칭할 수 없는 제3국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지구 밖 어떤 미지의 공간에 지구인들이 모인 느낌이었달까요?
다양함을 보고 있으면 저는 왠지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아니 인종이 좀 다양할 뿐인데 뭘 그리 과한 평을 하냐고요? 뉴욕이 보여주는 다양성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뉴욕의 정체성이자, 세계 1위 도시로 불리는 이유가 모두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타인과 함께 무지개를 만두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각자의 색을 찾는 동시에 타인과의 조화도 생각해야 하죠. 우리가 다 같은 빨간색이라는 목표를 두고 달려간다면 어떨까요?
'나는 쟤보다 빨갛지 못해. 쟤를 앞서려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지?'
'아니 근데 내가 대체 왜 빨간색이 되어야 하지?'등의 생각이 들기 마련이겠죠.
내가 왜 그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남들보다 더 붉어지기 위해, 더 빛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빨강부터 보라까지 이어지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 특정할 수 없는 나만의 색을 찾아간다면 어떨까요? '저 친구보다 앞서고 싶다.'가 아니라 무지개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나만의 색을 내려 노력할 수 있겠죠. 그래야 사회 속에서의 내가 나로서의 가치를 가지니까요.
이런 다양성을 무지개 같은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보게 되면 어쩐지 벅차오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도 이 사회에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약간은 허황된 것 같은 나의 꿈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20대 중반에 취업하고 30대 초반에 결혼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은 뉴욕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막상 뉴욕에 살아보면 그렇지는 않겠죠. 화려함 뒤에는 너무나 비싼 물가와, 어려운 취업과 치열한 경쟁이 있겠죠. 여행자의 시선과 거주자의 시선은 너무나 다르니까요. 뉴욕의 취준생이라고 해서 한국의 취준생보다 특별한 건 없겠죠. 어디서나 삶의 무게를 견디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다만 완전히 다른 문화와 생활권에서 살아왔던 사람들과 부대끼고, 다채로운 삶을 마주하며 이런 삶도, 저런 삶도 있다는 걸 보는 것 만으로 나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삶을 돌아볼 기회도 주어집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는 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뉴욕에선 '나는 내 삶을 잘 이끌고 있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너무 개성이 없나, 너무 무난한가?'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놀랍게도 그냥 다시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쉬면 불안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만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상태로 아주 재빠르게도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목표라고는 '남들만큼 하자'라는 게 전부였던 제가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습니다.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뒤돌아보며 나름 잘 살아왔다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장점들을 들여다보고, 이걸 더 살리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취업에는 도움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잘만 살리면 나만의 무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믿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여전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직업을 정하는 건 여전히 너무나 어렵습니다. 뉴욕의 다양성을 보고 왔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의 걱정이 싹 사라지지도, 멘탈이 자유로워지지도,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도 아닙니다.
내가 되자.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을 대입해 보았을 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삶을 살자
정도의 자신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진장 노력해야겠지요. 다만 남의 삶과의 비교는 조금 덜 할 것 같습니다. 주변이 잘되면 질투가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이 궁금하고 기대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합니다. 대학 전공, 복수전공과 전혀 연관 없는 일들을 하고 싶은 것 같거든요. 남들보다는 조금 느리겠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그 시간과 경험들은 생각지도 못할 때에 저를 도와줄 것이라 믿습니다.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가 가장 큰 배움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