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살아간 음악가들①
동시대를 살아간 위대한 음악가들은 인간적으로는 어떤 관계였을까. 우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작곡가들의 생몰연도를 살펴보자.
▲베를리오즈 1803~1869 ▲멘델스존 1809~1847 ▲슈만 1810~1856 ▲쇼팽 1810~1849 ▲리스트 1811~1886 ▲바그너 1813~1883 ▲브람스 1833~1897
자신들이 태어난지 200여년이 지난 현재도 엄청나게 연주되는 작품들을 만들어 낸 위대한 작곡가들이 19세기라는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것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의식하고 교류하고 때론 대립하기도 했다.
우선 당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당시 파리에선 귀족들이 자신들의 집 일부 공간을 접견실로 개방하는 일이 흔했는데, 살롱으로 불린 이 공간에서 귀족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소위 '사교계'를 형성했다.
당시 살롱에는 대체로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고 소파와 의자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됐다. 참석자들은 다양한 주제로 얘길 나누기도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참석한 음악가에게 연주를 청하는 게 일반적인 살롱 모임의 풍경이었다.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기 보단 살롱에서 안면이 있는 소수의 참석자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길 선호하는 음악가들도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쇼팽이다.
파리에선 리스트의 여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살롱이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마리의 살롱을 출입했는데 면면을 살펴보면 문인들 중에선 하이네,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알프레드 드 뮈세, 알프레드 드 비니, 음악가 중에선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등이 주요 멤버였다. 한마디로 다구의 살롱은 프랑스 예술계의 축소판이었던 셈이다.
이중 쇼팽과 리스트는 동년배인데다, 피아노 연주에 귀재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교류하는 친구가 됐다. 당시 자료를 보면 서로의 연주와 음악에 대해 견제하는 듯한 발언도 보이지만 대체로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관계였던 걸로 보인다.
이들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리 살롱 멤버 중 한명이었던 피아니스트 페르디난트 힐러(1811~1885)가 전한 내용이다. 파리의 한 카페 테라스에서 힐러와 쇼팽, 리스트, 멘델스존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고 한다.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들 넷이 한꺼번에 파리에 머물고 있던 시기인 1832년 초로 보인다. 당시 이들 4명 모두 20대 초반 나이였던 시기다.
지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명이었던 칼크브레너가 최고급 옷을 차려입고 실크 해트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이들이 모여 있는 카페 쪽으로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칼크브레너는 옷차림에서 알 수 있듯이 깔끔하고 단정한 성격인데다 겁이 많아 젊은 사내들 사이에선 놀림감이 되기 십상인 캐릭터였다.
혈기방장한 나이의 이들 4인방은 당시 40대 후반이던 칼크브레너를 향해 뛰쳐나가 그를 둘러싼 뒤 힐러의 표현대로라면 '품위없는' 말로 놀래대기 시작했다. 시쳇말로 다구리를 놓은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칼크브레너는 결국 당황한 표정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칼크브레너는 당시 파리 음악계에서 최고의 연주자이자 선생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쇼팽도 한때 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배울지 고민했을 정도로 그는 4인방에겐 음악계 대선배였다. 불멸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같은 사교계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파리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쇼팽과 리스트를 만나기 위해선 소개장이 필요했다. '현대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들(Great Piano Virtuosos of Our Time)'이라는 책을 쓴 벨헬름 폰 렌츠(1809~1883)라는 인물은 작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와 오랫동안 교류해 왔는데, 어느날 쇼팽을 만나고 싶다며 리스트에게 소개장을 부탁했다. 1842년 일이다. 쇼팽에게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평가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리스트는 소개장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통행 허가증이 없으면 그와 절대로 만날 수 없어요. 일류 작가나 예술가들 사이에선 원래 그런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니깐요."
이후 쇼팽의 집을 찾아간 렌츠는 "쇼팽 씨는 지금 파리에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시치미를 떼는 하인에게 리스트의 소개장을 건냈다. 그러자 곧바로 쇼팽이 나타나 렌츠를 맞이했다고 한다.
쇼팽과 리스트는 워넉 젊은 시절부터 교류하다보니 서로의 성격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친 렌츠에게 쇼팽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십니까"라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습적인 질문에 렌츠는 조르주 상드도 읽고 장자크 루소도 읽는다고 얼버무렸다. 상드가 쇼팽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당시 파리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쇼팽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스트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쳐 줬죠? 알고 있어요. 리스트로부터 비결을 배워 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쇼팽은 처세에 능한 리스트의 캐릭터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