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렐류드 작품번호 28-4번
영화 '노트북'(2004년)에서 여주인공 앨리(레이첼 맥아담스)가 어두운 밤 폐가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상류층 가정의 10대 소녀 앨리와 사랑에 빠진 가난한 청년 노아(라이언 고슬링)는 앨리를 이곳으로 데려와 이 집을 완전히 수리해 둘만의 아늑한 집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후 앨리가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곡에는 슬픔의 정서가 가득하다. 곧 다가올 이별의 전조였던 것이다.
앨리가 연주한 곡은 쇼팽의 24개 프렐류드(전주곡, 작품번호 28번) 중 4번째 곡이다. 이 곡은 테크닉적으론 무척 쉽다. 왼손은 세 개의 음으로 구성된 화음을 누르고 오른손으론 단선율의 멜로디를 연주한다. 하지만 왼손 화음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반복되는 긴장과 이완을 섬세하게 표현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39세로 단명한 쇼팽은 평생 200여 개의 피아노 곡을 남겼다. 19세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쇼팽의 피아노 곡은 대체로 화려한 기교를 요구한다. 피아노 연습곡, 마주르카, 폴로네즈 등 쇼팽의 대표작은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에게도 상당히 도전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음악적 완성도를 논외로 하면 아마추어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쇼팽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 같다. 죽기 전 쇼팽 요청에 따라 이 곡은 쇼팽 본인 장례식에서 연주됐다. 자신의 작품 중에서 본인 장례식에 쓸 곡을 고르는 음악가의 심리도 일반인과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그만큼 이 곡에 대한 애착이 컸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쇼팽은 자신의 장례식을 하나의 음악회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리 마들렌 대성당에서 진행된 쇼팽의 장례식에는 조문객 30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 곡은 피아노가 아닌 성당 내 오르간으로 연주됐다.
유튜브에선 이 곡의 오르간 연주 버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눈을 감고 오르간 연주를 듣다보면 당시 성당에 가득했을 비통함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다. 이 곡에 앞서선 쇼팽이 평생 사랑했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도 연주됐다. 이 또한 쇼팽이 자신의 장례식 연주곡으로 선곡한 작품이었다.
프렐류드 4번 악보를 들여다보면 죽음의 정서가 묻어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곡의 후반부에 적힌 표현법은 스모르잔도(smorzando)다. 영어로는 'dying away', 즉 서서히 사라져가듯 연주하라는 의미다. 죽음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실제 19세기 최고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에 '질식(suffocation)'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 또한 이곡에서 희미한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던 게 아닐까.
이런 배경설명을 듣다보면 왠지 쇼팽이 죽음을 앞두고 객혈하며 쓴 곡 같지만, 실제론 쇼팽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20대 중반에 작곡됐다. 24개 프렐류드는 쇼팽이 1835년부터 1839년 사이에 썼는데, 고향 폴란드를 떠나 1831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쇼팽이 파리 음악계를 종횡무진하던 시기다. 연인 조르주 상드와 사랑을 시작한 게 1838년이었으니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이었을 때다.
사실 음악작품을 반드시 작곡 당시 작곡가의 정서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학구적인 측면에서 논할 여지가 많다. 우선 쇼팽이 24개의 프렐류드를 쓴 건 조성음악에서 존재하는 24개 조성 전부를 활용해 작품을 하나씩 쓰려는 시도에서였다. 4번 작품은 24개 조성 중 하나인 마단조(e minor) 곡이다.
또 이 곡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긴장감은 비화성음의 적극적인 활용에서 비롯됐다. 예를 들면 '도-미-솔' 3개 음으로 구성되는 C장조 화음에 불협화음을 내는 '레' 또는 '파'를 섞는 것이다. 이런 비화성음이 화성의 변화와 따라 안정적인 협화음으로 전환되면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코로나19로 우울한 정서가 가득한 겨울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쇼팽의 피아노 프렐류드 4번과 함께 잠을 청해보자. 유튜브에 'chopin prelude op 28 no. 4'라고 입력하면 조성진을 비롯한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qlyrahFK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