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기획자와 번역가 그 사이 어딘가

새로운 도전

by 라일


'통번역사'라는 정체성을 유지한지 5년.


통번역 대학원 2년, 인하우스 통번역사 1년 반, 프리랜서 통번역사 1년 반.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였고, 나에겐 굉장히 밀도 높은 5년이었다. 2024년, 긴 고민 끝에 '영어 통번역사'란 타이틀을 내려놓고 새로운 직무에 도전했다.


작년 4월, 프리랜서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스위스의 눈 덮인 산과 그 앞에 펼쳐진 강가를 바라보던 중 사촌 언니한테 카톡이 왔다. 카톡을 열어보니 여행앱 글로벌 콘텐츠 기획자 공고였다. 백조가 유유히 떠다니는 강가 앞 스타벅스에 앉아 이력서를 작성했다. 무언가 시작이 필요했기에 일단 발부터 내밀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한국에 돌아가 이틀 후 바로 면접을 보러갔다. 결과는 최종 합격. 사실 떨떠름한 마음이 컸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했다.


2024년 5월에 입사했으니, 이제 벌써 반 년이 넘어간다. 여러모로 뚝딱이며 콘텐츠 기획자라는 옷을 내 몸에 맞게 재단하는 시간이었다. 나름 단정한 옷매무새를 갖추기 시작한 지금, 일 기록을 시작해보려 한다.




한국인, 영어 콘텐츠 기획자


국내 여행앱으로 시작한 우리 회사는 소수의 TF팀을 꾸려 외국인 대상 여행앱을 개발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여행앱을 만든 것이다. 초기에는 일본 시장을 겨냥했지만, 영어권도 커버하기 위해 영어 콘텐츠 담당자를 찾고 있었고 5개월 동안 수많은 지원자가 거쳐간 그 자리를 운좋게 꿰찼다.


입사 후, 왜 5개월 동안이나 사람을 뽑지 못했을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1) 영어가 모국어인데 2) 콘텐츠 기획 능력이 있고 3)한국에 대해 잘 알고 한국어를 잘하며 4) IT 회사 경험도 있는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 유사성 때문에 한국어 구사 가능한 사람을 꽤 찾을 수 있지만, 영어가 모국어인데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한국어-영어를 균형 잡히게 잘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강점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이지만, 영어도 상당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어 담당자는 일본인이, 중국어 담당자는 중국인이 뽑혔고, 영어 담당자는 한국인이 뽑힌 셈이었다. 그러다보니 타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과 콘텐츠 기획은 한국인인 내가 주로 리딩하게 되었다.




못다 이룬 꿈, 이제 시작일까?


사실 통번역 대학원 졸업 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문 공무원 자리를 거절하고 글로벌 마케팅 인턴직에 지원했다. 말랑말랑하고 재밌는 번역, 소비자와 가까이 소통하고 싶은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턴으로 입사해 6개월간 SNS 카피라이팅, 영문 뉴스레터, 블로그 발행을 주로 담당했다. 내 커리어 통틀어 가장 즐겁고 신나게 일했던 시간이었다. 맑눈광이란 단어가 딱 맞을까. 패기 넘치던 20대 끝자락, 인턴 나부랭이가 시스템 효율화를 외치며 조직 운영 개선안을 팀장님한테 내밀고 웹 UI 개선안을 디자이너한테 넌지시 건내며 여기저기 오지랖을 부렸다. 너무 감사하게도 팀에서는 나의 아이디어를 전부 수렴해 반영해 주었다. 나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는 동료와 상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지금 돌아보니 더욱 감사하게 느껴진다.


인턴직이 끝나갈 때쯤, 마케터로 커리어를 이어갈까 고민했다. 그래도 내가 그토록 꿈꿨던 통번역사로 일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통번역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렇게 오랜시간 마음 속에만 품어왔던 카피라이팅, 소비자와의 소통, 콘텐츠에 대한 갈망을 이제야 터트리게 되었달까. 콘텐츠 기획자로 일한지 8개월차. 재밌는 부분도 있지만, 고민도 그만큼 많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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