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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Feb 18. 2022

좁고 얕은 나의 인간관계에 관하여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미성년일 때는 일종의 우울증으로, 건강하게 관계를 맺는 법을 알지 못했다. 친한 친구와 좀 맞지 않더라도 단짝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내려놓으면서까지 관계를 맺곤 했었다. 그런 관계는 길지 못했다. 상대방이 부담을 느껴 쉽게 끝이 났다.

단짝이 아닌 친구는 어떻게 대하는지 몰라 처음부터 관계를 맺는 것을 망쳐버렸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비로소 주체적으로 친구 관계를 맺는가 하더니, 어리석고 서툰 나는 이내 곤두박질치며 모든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그런 나도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친하다 여기는 친구가 몇 생기게 되었다. 그중에 J는 조금 특별하다.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할까 말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가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J를 친한 친구라 여긴다.


대구에 신천지 관련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택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었었다. 마스크 5부제 같은 제도도 생기기 이었고, 택배마저 막힌 도시는 아직 실체를  모르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타지에 사는 사람들이 고향인 대구를 다녀왔다면, 병원에서조차 문전박대를 당하는 그런 때였으니까.


J는 그런 때에 대구에 있는 내 친정에 전해주라며 마스크를 보냈다. 마구잡이로 챙겨 놓은, 브랜드도 색깔도 다 다른 마스크 몇 십장을 열어보니 택배를 싸던 J의 간절함과 긴급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는 네 숨을 나누어 주었구나.’ 앞뒤 맥락 없이 문득 친정에 보내라는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택배는 한동안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J는 H와 함께 노량진에서 임용시험 스터디를 하면서 만나게 된 친구다. 일면식도 없는 셋이 같은 시험을 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의지하고 많은 것을 공유했다. 나는 그해 임용시험에서 최종 탈락하며 기간제 교사의 길을 선택했고, H는 타고난 입담과 결벽 같은 완벽성을 추구하는 성격을 잘 살려 학원 강사의 길에 접어들었다. J는 다정하고 섬세했다.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과외선생님이 되었다.


20대의 우리는 내가 가진 것들과 네가 가진 것들을 견주어보며 치기와 시기로 더러는 서로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편함이 H를 떠나가게 만들었던 것일까. H는 홀연히 연락처를 바꾸고 ‘우리’를 떠나게 되었다. J를 만나면 이야기의 끝은 항상 H였다. H는 왜 그랬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잘못했을까? 지금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나는 가끔 H가 피곤했었다. 바운더리가 명확한 친구라, 여기까지는 축의금 얼마, 그다음 바운더리는 조의금 얼마를 정해놓고 사는 H가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라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또한 내 쪽의 바운더리로 H를 규정했었다.


남은 우리, J와 나에게 가족이 생기고, 특히나 절대적으로 내 삶을 지배하는 존재인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 관계를 더욱 안정되고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내 관계의 모든 것이던 친구가 더 이상 내 전부가 아니게 되면서부터 진짜 관계가 보였다. 나는 비로소 나에게 피로감을 주는 인간관계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입안의 혀처럼 면전에서만 좋은 말을 하는 이의 이면이 충분히 상상이 되었고, 어쩐지 상대방에게 인맥관리용이 되어버린 것 같은 얄미운 인간관계는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할 빚으로 잘 기억해뒀다 필요한 순간에 제값을 치르면 그만이었다. 아무개의 사생활과 험담의 가십거리를 잔뜩 가져와 풀어놓는 이는, 나에게 흥미와 상처를 동시에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J와의 대화 속에서 더 이상 H를 필연적으로 소환하지 않는다. 그간 쌓아온 굵직한 일들이 많아, 관계의 기원을 떠올리는 일이 너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문득 H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남은 우리에게 만약 H가 돌아온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던 대화를 마저 이어가며 슬며시 앉을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의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김금희, 경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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