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지안 Nov 18. 2022

핼러윈데이에 맘충을 언팔한다.

세월호 참사와 다르게 이태원 참사 이후 나는 한동안 분노의 감정에 사로 잡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격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나의 감정 소모도 물론이거니와, 반론과 상대할 생각을 하면 상당히 피로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으면 나의 분노를 삭일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 아이들이 물속으로 뛰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깊고 차가운 바다에 갇혔을 때, 수학여행 간 미성년의 죽음은 비통하고, 자기 발로 이태원에 서양문화를 즐기러 간 젊은이의 목숨은 죽어 마땅한가. 2022년 10월 29일 그보다 많은 수의 젊은 (아이)들이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기사를 읽을수록 ‘우리 사회의 괴물이 이렇게나 많았나.’ 참혹했다. 참사 현장을 기록하고 조회수를 늘리고자 라방을 진행한 유투버들. 생사의 현장에서 차가운 카메라를 들이대던 다수의 시민들(사실 시민들이라는 인격적인 호칭을 하고 싶지도 않다.) 홍대 가서 2차나 하자던, 창백해져버린 고인의 시신을 보며 ‘죽었는데 개 예쁘다’며 망자를 모독하던 뒷이야기를 읽는 내내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런 괴물들을 길러내게 된 것인가.’


남편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 이 정도였나?”


“시민? 시민의식? 문명화된 인간이 기본권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약속하는 게 시민의식 아닌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짐승만도 못한 거지.”


밸런타인데이에 젖소의 고통에 연대하고자 ‘피로 물든 젖꼭지’의 시위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이는, 생명의 존중이 인간을 넘어 동물권에 대한 의식의 확장으로 이미 이루어진 대한민국에서, 압사 사고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니. 이렇게 인간의 생명이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이 없었다. 시민의식의 부재라는 표현도 공감의 부재라는 표현도 모두 적절하지 않았다. 끔찍한 괴물들의 대거 출현을 목도한 것 같았다.


‘독수리와 소녀’라는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기자가 있었다. 생명이 다하면 곧 독수리의 먹잇감이 될 소녀. 그 장면을 촬영해 남수단의 비참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구호활동에 힘을 실은 사진이었다. 수상자인 카터는 수상 3개월 후 사진을 찍는 것보다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찰나였다는 것도, 촬영 이후에 소녀를 구조했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도 사진을 찍는 순간 카터의 ‘인간성’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은 정당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SNS를 열어 이웃의 피드를 넘기는데, 믿을 수 없는 사진들을 보았다. 영어유치원 행사로 코스튬을 예쁘게 차려 입고 즐겁게 하루를 보낸 사진, 지인 가족들과 캠핑을 하며 ‘해피 핼러윈’ 가랜드를 걸어놓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핼러윈을 기념해 여행을 하며, 새로 산 명품 가방을 손에 걸고 웃으며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하는 사진. 사건 이후 만 하루가 지나자 더 많은 사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사진을 꼭 지금 이 시점에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이런 공간에 꼭 전시해야만 하나. 지금 해피 핼러윈 글자만 봐도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 새끼 예쁜 모습 내 가족들끼리만 공유하고 전시는 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맘충.’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혐오 표현을 처음으로 내뱉어 보았다.


애도의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애도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슬픈 중에도 일상은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 공감으로 같이 울어줄 수 없다면 최소한 침묵은 해줄 수 있지 않나.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자식을 키워본 엄마라면. 당신들이 세월호 참사에 자식을 잃고 단식으로 농성하던 부모 옆에서 자장면 피자 치킨 시켜 조롱 집회하던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나.


타인의 슬픔 앞에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나의 명품가방과 우리 가족의 돈지랄로 만들어진 행복함을 전시하던 당신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언팔한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그저 웃는 얼굴로 ‘이태원 참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추신으로 달던 당신과의 인간적 교류를 단절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것이 계약직 교사 집단의 문제라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