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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Nov 24. 2022

예민하게 태어난 내 딸에 관하여.



“어머님 자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지역 교육청에서 학기에 한 번 희망자를 받아 상담센터와 학부모를 연결해준다.


“어려움이요? 고민은 있어요. 제 딸은 예민합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낯선 상황에 두려움이 더 크고, 다섯 감각이 모두 예민한 것 같아요.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엄마의 감정 섞인 억양의 변화를 잘 알아채고요, 둘째에게 훈육을 해도 엄마의 기분이 안 좋으니 자기 잘못이 아니라도 사과를 해서 짠할 때가 있어요. 선생님 그런데 근본적으로 저는 이런 고민이 있어요. 예민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어떻게 보면 감각적으로 예민하다는 것은 이 아이가 타고난 재능일 수 있잖아요. 하다못해 문제를 풀 때도 다섯 개의 선지 중에 다른 하나를 고르는 게 시험인데, 예민한 아이는 그 사소한 차이를 남들보다 잘 아는 것이고요. 예민하게 태어난 아이를 구태여 둔하게 만드는 게, 부모가 지향해야 할 양육의 방향인가 해서요.”


“어머님 예민한 아이는 책임감을 길러주셔야 합니다. 집에서 동물을 키우든 반드시 본인 몫의 할 일을 정해주세요. 그래야 대인관계에서…”


상담 선생님의 결론은 문제냐 아니냐로 가르자면 문제다 쪽이었다. 예민한 아이는, 내향적이고, 내향적이면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적 설명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 솔루션의 전제는 문제다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내 아이를 문제다 쪽으로 말하는 솔루션을 받아 적고 냉장고에 붙인 후 한참을 읽어보았다. 미안했다. 그러다 문득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의 대상이 잘못되었다. 내가 내 아이를 키우는 가치관을 전문가에게 간편하게 정해달라며 맡긴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니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아이의 예민함을 문제라 여기지 않기로 했다. 예민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받은 능력이다. 감각적으로 예민하니 섬세하고, 섬세하니 따뜻할 수 있다.


 ‘예민한 아이는 잘 양육하면 성실하고 공감 지능이 뛰어난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육아서의 방향성과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앞으로의 세상에 예민함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의 통찰도 어디선가 읽었었다. 예민하다는 내 아이의 기능을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볼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다. 좋은 결과를 예견하지만 아이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덜어내기에 충분치 못했다.



여름 내 초록이기만 할 때는 산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더니, 단풍이 들자 나무 나무가 보였다. 입체감을 드러내며 산이 아닌 나무의 존재를 알리는 계절이 참 아름다웠다.


감동의 끝은 내 딸에게 닿았다. 내 딸이 글을 쓰거나 음악을 다루는 아니거나 그림을 읽을 줄 아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고. 말이나 글로, 음악으로 색채로 표현하는 것을 아는 아이에게 계절의 변화는 얼마나 경이로운 기쁨이며 행복이겠냐고. 그렇지만 그 감각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아마 마음 아플 일이 남들보다 더 많을 것이란 것도 짐작했다. 섬세한 내 아이에게 세상의 자극은 남들보다 크고, 아픔도 오래도록 깊이 남을 테니까.


‘자식은 잘 키우려고 낳는 게 아니라, 사랑하려고 낳는다.’ 지인이 밑줄 그어 보내 준 육아서의 잠언이 내 마음을 붙잡는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 녹음으로 가득 찬 지평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예민하든 둔감하든 간에 내 아이가 지닌 기질 그대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되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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