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 내게 베풀던 환대와, 교원으로서의 전문성을 존중해주던 태도는 가끔 단어 하나로 명암을 달리한다.주로 나와의 일대일 대화 상황이 아니라, 내가 그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는 상황에서 많이 발생한다.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학교도 예측 가능한 안정성과 겪어보지 못한 변수가 공존하는 집단이다. 4~5년마다 조직을 옮기는 정교사와 달리, 기간제 교원은 수개월부터 1년 단위로 소속집단을 바꾸게 된다. 30년 근속한 정년퇴직 교사가 7~8명의 관리자를 만난다면, 기간제 교원은 그 과정을 1년에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관리자가 어떤 사람인지 눈치가 빤해진다. 어떤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고, 어떤 리더십은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겨우 몇 달을 근무할 근로자인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계약직 근로자를 보는 기저의 시선이 어떠한지도 제법 빠르게 알 수 있다.
학교는 나이스라는 시스템을 활용하여 각종 공문서 처리와 성적처리를 하는데, 인증서를 중간에 발급받고, 휴직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럴 때면 관리자인 교감선생님들도 자문단에 문의를 하게 되는데, 으레 ‘기간제를 썼는데‘ 로 상황설명을 시작한다.
인력을 고용하는 경우에 정규직 인사는 보통 쓴다는 표현을 잘 붙이지 않는다.
교과 회의 시간이었다. 병가를 쓰던 동 교과 교사가 복귀가 어렵게 되어 휴직원을 낸 상황이었다. 신규 기간제 교원 채용과 업무 분장을 위해 동 교과 선생님들이 모였다. 휴직할 선생님이 맡은 업무는 3학년 담임이었다. 고3의 담임이 바뀌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입시를 압둔 아이들과 학부모의 불안감이라는 감정적 문제부터, 당장 생활기록부 기재와 수시 원서 작성이라는 큰 과제가 덜컥 주어지는 것이다.
선생님들끼리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교장 선생님이 나 불러서 담임 맡으라는데, 난 못한다 했지. 내가 이 나이에 담임하게 생겼냐고.“
듣고 있던 다른 교사가 대화를 받았다.
“그럼 저보고 하란 소린데요. 저도 못해요. 저 육아시간도 써야 하고. 암튼 못해. 작년에도 내가 어려운 업무 하면서 한 번 양보했는데 교장 선생님 왜 저러시나 모르겠어요. 기간제 하라 해. 그 기간제가 담임하면 되잖아요?”
이미 담임을 하는 세 번째 교사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아무래도 기간제한테 고3 담임을 하라고 하기에는… 학부모 민원도 그렇고.”
“그러라고 기간제 쓰는 건데 왜 안돼요? 원래 근무자가 하는 업무 그대로 받는 게 원칙이잖아요.”
무수히 많은 말들이 오갔다. 대화 어디에도 기간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자뿐 아니라 교사들도 기간제는 ‘쓴다’고 표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화가 진정되고 그 자리에 기간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는 모르겠다. 인지했다손 치더라도 ‘선생님 미안해요 표현이 좀 그랬죠?’라는 사과는 절대로 아무도 하지 않길 바랐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대화에서 그렇게 양극의 이야기를 들으면 앞으로 그 선생님이 하는 말의 진정성을 모조리 의심해볼 것 같았다.
‘우리 학교와 인연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하던 모습도 그들이 가진 여러 자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 환영사의 ‘우리’라는 집단에는 잠시 배제되었고, 그 쓰인 기간제가 곁에 있다는 것을 대화 중에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잘 반영한다. 학번을 묻는 습관은 한국 사회의 연령주의가 학력주의와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다. 학력 자본을 가진 사람이 나이를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에둘러 묻는 완곡어법이다. 표면적으로는 완곡한 어법이지만, 이러한 질문을 주고받아도 되는 계층의 언어를 습득한 자신의 위치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이다. 그러면서 조심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학번을 물어도 되는 ‘좁은 세계’에 산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류의 언어는 빠르게 체화된다. ‘요즘 대학 안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고졸은 없는데’, ‘나는 특성화고 나온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어’라는 말들은 비대졸자의 보이지 않음을 정상화한다.
이라영, 말을 부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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