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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Oct 27. 2022

나는 왜 쓰는가


임용고사를 통과하지 못한 계약직 교사. 학교에도 신분제가 있다면 내가 아들은 아들인데 조강지처의 아들이 아니라 천출의 서자(庶子)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동료들과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할 때에도 대화 속에 ‘우리’라는 집단에 수도 없이 들었다가 때가 되면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집 둘째 딸은 뭘 하는고?’하고 자식의 신분이 궁금한 이웃이 물으면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선생질하잖아. 고등학교에서.’

 ‘이야 딸내미 공부 잘했네. 잘 키웠어. 고등학교에서 선생질이라니.’ 하는 칭송을 받았다.

엄마도 나도 그런 칭송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기에는 거짓을 방조한 것 같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현장에 내가 있진 않아도 엄마 뒤로 한걸음 물러서 숨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라는 집단 안에는 교사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육행정공무원, 무기 계약직의 교육 공무직원, 계약직 교사, 시간강사, 방과후 강사 등 많은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집단에 들어오기 전에는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교사라는 직업 앞에 ‘기간제라는 단어를 두고 진짜 교사인지 아닌지 신분의 진위여부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였다. 아이들을 구조하다 사망한 계약직 신분의 교사 2명이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망보험금을 수령하지 못하면서 유족이 교육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유족은 결국 패소했지만, 2017 공무원연금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소급 적용받아, 순직을 인정받게 되었다.


드라마 ‘블랙독’에서 주인공 고하늘을 전복된 수학여행 버스에서 구하다 폭발로 인해 사망한 '교사 김영하'도 사립학교 정규직 교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학교를 구성하는 구성원 중에 비정규직이 있으며, 그것이 교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 이슈나 드라마를 통해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며 기간제 교사라는 내 신분을 노출하면. ‘열심히 살지 않은 개인의 신세한탄을 공개적으로 쓰는 것’에 대해 불편하다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일부 맞는 말이다. ‘나는 임용고사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냐’고 물으면 ‘치열의 기준이 어느 만큼이죠? 그 기준에 따라 저는 열심히 하기도 했고, 열심히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 나는 어떤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는 해보지도 않고 듣기 싫은 푸념을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학교생활이나 교단일기로만 한정하지 않고 기간제 교사의 교단일기로 부제를 달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인생의 열패감이나 푸념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딸자식이 무얼 하냐는 물음에 ‘선생질’이라고 ‘계약직’을 생략한 단답으로 일관하던 엄마와, 그런 엄마 뒤로 숨던 내 양심이 조금 반영되었다. 또한 다른 교사들보다 서둘러 아이들을 떠나야 하는 기간의 아쉬움을 담아 나의 교직생활을 기록하고 싶었다. 애틋함이라 하면 적절한 이름이 될까.


브런치 북을 만들고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하며 남편에게 묻는다. ‘내 글이 과연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 글인가?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이다지도 변변치 못한 내 일상이 어떤 효용이 있을까?’ ‘그건 독자의 몫이고. 힘을 빼고 그냥 해봐. 아님 말고.’ 돌아온 답이었다.


내 자식을 포함해 내가 교단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조금 더 다듬어 말하면 훈육은 하되, 감정적인 화풀이는 잘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독한 년’이라는 칭찬 같은 욕을 들을 때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저(아이들)도 기분이 안 좋았겠죠. 그냥 예의 바르고 싶지 않았겠죠. 오늘따라 그냥이요.’

MBTI로 사람의 성격을 알아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질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사람은 이런 유형이야.’라고 몇 개의 해시태그를 붙여 이해하는 것은 수용자 중심의 폭력성이라고. 보편성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나의 편의를 위해 인지적 간소화를 하는 것이니까. ‘이 학생은 문제아다.’ ‘이 학생은 모범생이다.’ 이런 틀에 넣지 말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 같은 것이다. 오늘 이 아이들의 행동을 날씨처럼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글을 쓰며 그런 아량을 나 자신에게도 베풀어보려 한다. #계약직, #워킹맘, #교사 라는 해시태그를 조금 털어내고 순간순간 드는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교단에서 느끼는 갈등도 '그래 봤자 계약직인데 무얼.' 하는 체념은 하고 싶지 않다. '계약직은 계약직입니다만.' 인정으로 시작해 나만의 시시각각 변하는 서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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