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발생원인신고서]
보험 공단에서 큰아이 사고로 진료받은 내역을 조사하고자, 사건의 개요를 요청해왔다. ‘낙상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과 경막하 출혈, 동맥류 파열’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볼펜을 든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사고로 용처를 잃은 킥보드는 아이들 눈에 띄지 않는 창고에 있다. 아이를 다시 태우진 않을 것이라도 조금 더 두고 지켜볼 생각이다. 내리막길 앞에서 ‘엄마 여기서 내가 넘어졌었지.’ 하는 아이의 트라우마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고, 그 트라우마가 극복되면 우리도 아이 고집에 이끌려 헬멧을 벗기고 킥보드를 태우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고에 짐을 정리하러 들어갈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때때로 어제의 일처럼 간담이 서늘해진다.
완치 판정을 듣기 전까지는 충격으로 멍이 진 아이 얼굴보다, 두개골과 두피 사이에 가득 찬 피고름으로 부풀어 오른 머리 모양보다, 사진첩에 순진무구한 얼굴로 놀고 있는 모습에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멍하게 앉아 웃음기도 사라지고, 누런 위액까지 게워내는 내 아이에게 저런 생명력이 있었던가 까마득해져 눈물이 넘쳐흘렀다.
안부차 연락이 와서 아이에게 헬멧을 씌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외출을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던 사람들이, 실은 그렇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짐작했다. 반면교사 삼아 급히 보호장구를 샀던 사람들도 얼마 가지 못해 벗어 버리는 아이에게 질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경각심이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사고로 무언가를 잃을 뻔 한 경험만큼 경각심이 무겁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 사고가 불운이 아니라, 사고가 나지 않는 일상이 큰 행운임을 그들이 몸소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걱정을 가장한 개인적 호기심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질문들은 부모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후유증을 떠올리게 해 말초의 신경까지 곤두서게 했다. 그 모두가 친소관계에 기대어 등에 비수를 꽂는 말들이었다.
지금같은 마음이면 ‘당신도 자식 키우는 부모 아니오? 지금 누구보다 가장 안타까운 게 부모라는 것을 모르나요? 왜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죽지 못한 사람 마음을 사지로 내몹니까?’ 하고 악다구니라도 써보겠지만 그때 우리는 그 모든 비난을 집어 흡수하고 심해로 침잠하는 묵직한 덩어리들 같았다.
‘맞아. 내 탓이지. 부모 탓이지. 이랬더라면.’ 상상의 시작은 늘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고 직전, 사고 난 당시로 향했다. ‘내 몸이 부서져서라도 아이를 안았으면 어땠을까.’
한없이 가라앉고만 싶은 마음을 일으켜준 것은 주변의 침묵과 기도였다. 그 어떤 과학적이고 논리적 예측보다, 당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겠다는 짧은 진심이 미래를 낙관하게 했다. 학교에 출근하면 돌보아야 할 다른 아이들이 있다는 책임이 나를 일으켰다. 엄마가 출근한 현관에 머리를 두고 누워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 자식을 두고, 다른 자식을 돌보러 출근하는 아이러니한 일상에서 지각 한 번 허투루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단련시켰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인용)
시간이 꽤 지났다.
부모가 슬픔과 공포에 물들었던 동안 내 아이들의 귀여운 시간도 훌쩍 지났다. 더 늦게 전에 아이들의 찬란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평범한 행운을 만끽해야겠다.
총기 사건이 터지고 몇 달 후 콜럼바인에 신입생이 들어오자 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신입생들은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을 도와주세요."이미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던 학생들에게 교장선생님의 말은 어처구니없었을지 모른다. 이미 자기 문제로도 충분히 힘든데 무슨 힘이 남아돌아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교장의 말을 따랐다. 교장의 생각은 옳았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살 수 있다. 잭의 말대로 힘을 주면서 힘을 얻는다.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