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ticality 무한한 자연의 깊이
앞서 논의한 ‘평면성’이 근대 회화의 개념을 음악으로 전유한 경우라면, ‘수직성’은 그 개념이 공간적이며 초월적 차원으로 확장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펠드먼이《로스코 채플》의 추상적 섹션에서 음악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시간의 흐름을 멈춤으로써 ‘평면성’이라는 감각의 장을 열었다면, ‘수직성’은 절제된 구조 속으로 시간 자체로서의 자연을 끌어들이며 열린 형태의 초월적 구조를 형성한다.
‘추상적 섹션’에서 12음 클러스터의 복합적인 음향 층위는, 두껍거나 무겁게 가라앉기보다 서로를 관통하며 유동적인 공간이 만들어내는 가벼운 청각적 인상을 형성한다. 이는 빛이 겹쳐지되 강도를 더하지 않고, 공기 중에서 부유하듯 공간 속으로 확산되는 자연 현상에 비견될 수 있다. 즉 내부의 움직임은 매우 활발하지만, 그로부터 드러나는 음향은 오히려 투명하며, 깊이가 없는 듯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평면성’이 감각의 실체가 드러난 표면을 지칭한다면, ‘수직성’은 그 너머의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무한한 깊이를 가리킨다.
특히 ‘수직성’(verticality)은 전통적인 화성적 구조, 즉 기능화음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 음향과 구별된다. 각 성부의 자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대위적 어법과 닮아 있으나, 음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나 규칙에 의해 결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능적이지 않다.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리되 과잉되지 않고, 여백과 호흡을 중시하는 태도 속에서 투명한 공간이 형성된다. 소리들은 논리적 귀결을 향해 조직되기보다 자율적으로 생성되며, 각 음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려는 태도 속에서 자연의 시간성이 드러나게 된다.
위 악보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음들이 겹쳐지며, 투명하고 감각적인 음향의 표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34마디부터 시작되는 팀파니의 오스티나토가 규칙적인 패턴을 형성하는 가운데, 두 개의 합창 그룹과 알토 솔로가 시간차를 두고 포개진다. 전 음역대에 걸쳐 D–B 혹은 D♭–B♭ 음정이 교차하듯 중첩되며, 저음에서 지속되는 비올라의 D♭음과 합창의 D–C–B 하행이 더해져 총 네 개의 음으로 구성된 밀집된 음향층이 형성된다.
이처럼 유사한 패턴들의 시간적 어긋남과 음색적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여백은 중첩된 음향의 밀도를 상쇄시킨다. 서로를 간섭하기보다 독자적으로 흐르는 음들은, 동시성을 이루며 공존한다.
이러한 음향은 마크 로스코의 단색 회화에서 드러나는, 화폭 뒤로 반복적으로 덧입혀진 얇고 반투명한 색채의 층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유사하다. 1960년대 이후 로스코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단색 배경과 흐릿한 경계는, 수많은 붓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명한 색채의 표면을 유지한다. 아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염색을 입힌 듯한 화폭 아래로 스며드는 색의 깊이는 부유하는 듯한 시각적 울림을 만들어내며《로스코 채플》의 유동적 수직성의 개념과 맞닿는다.
‘평면성’과 ‘수직성’은 모두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고요함의 서로 다른 양상이라 볼 수 있다. 부동적인 표면의 고요함과 흐르는 시간의 깊이 속에서 드러나는 고요함은, 기능적인 울림이나 위계적 관계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계되기보다 시간의 불예측성을 향해 소리 자체를 열어두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로스코 채플》은 시간이라는 포착할 수 없는 대상 앞에 머물며, 미시적인 감각의 층위를 경험하게 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제까지 살펴본《로스코 채플》을 이루는 일곱 가지 고요함의 미학은, 소리가 하나의 감각적 실체로서 청자를 부드럽게 감싸는 물질성을 띠며, 시간과 더불어 존재함을 드러낸다. 소리는 생성과 소멸의 주기 속에서 자연의 리듬과 맞물리고, 감각적 실체로서의 음향층은 평면 아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며, 청자의 내면을 비추는 투명하고 고요한 표면이 된다. 결국《로스코 채플》은 다양한 감각이 교차하고 전이되는 자리에서 형성된 물질적이면서도 초월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로스코 예배당의 공간성과 로스코 회화의 색면과 맞물리며, ‘고요함’이라는 미학적 형식으로 수렴된다.
https://youtu.be/sj51jb0_T2I?si=hbveMbgqXWCwQ5Kw
1. 펠드먼은 “아무리 많은 소리를 던져 넣어도 그 안에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허기가 있다”고 말하며, “세 개의 작품을 이 동시성 속에 던져 넣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공간과 공기가 남아 있으며, 여전히 숨 쉬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 발언은 1968년 작품인《False Relationships and the Extended Ending》에 관한 진술로, ‘수직성’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단서가 된다. 수직성은 열린 공간 안으로 시간과 여백을 끌어들이는 음향적 구조로서, 겉으로는 정지된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기적으로 호흡하는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John Cage and Morton Feldman, Radio Happenings I-V, recorded at WBAI, New York City, July 1966-January 1967 (Cologne: Musik Texte, 1993), 109.
2. 토로네 수도원(L’Abbaye du Thoronet)은 12세기 수도원 건축물로, 단순한 형태의 반복적 회랑 사이로 빛과 그림자의 리듬을 끌어들인다. 이는 매개 변수들의 단순화를 특징으로 하는 ‘평면성’ 개념과 연결되며, 단순함과 소박함 속으로 자연의 깊이를 끌어들이는 로스코 예배당의 미학과 공명한다. 특히 이 수도원은 드 메닐 부부의 멘토였던 쿠튀리에 신부가 이상으로 삼았던 종교 예술의 건축적 모델이기도 하다. https://www.le-thoronet.fr/en/discover/history-of-le-thoronet-abbey
3. 마크 로스코,《무제》(파랑으로 나뉜 파랑), 1966, 종이에 아크릴, 85.4 × 65.3cm, 개인 소장. 마치 한국 전통 한지에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염색 기법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색이 빛을 흡수하는 동시에 스스로 발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소더비 경매 정보: https://www.sothebys.com/en/auctions/ecatalogue/2007/contemporary-art-evening-auction-l07024/lot.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