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젤란, 필리핀에서 전사 (1521)

인류 최초의 세계 일주 (1519~1522)

by 박성종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Fernão de Magalhães, 포르투갈 발음으로는 페르낭 드 마갈라예스)은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해 말루쿠 제도(The Maluku Islands, 일명 향료제도(The Spice Islands)로도 알려짐)고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의 목표는 새로운 서방 항로를 통해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34명의 선원을 이끌고 세비야를 출항했다. 선단은 대서양의 작은 군도인 카나리아 제도에 기항해 8명을 추가로 늘려 242명이 되었다. 이처럼 카나리아 제도는 앞서 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대양 항해 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2월 13일에는 리우데자네이루(現 브라질 동남부의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이후 남하를 계속해 남아메리카의 남쪽인 푸에르토 산 훌리안(Puerto san Julián)에 도달했고, 5개월을 머물렀다. 이 시기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마젤란은 잘 극복했다.


그렇게 항해를 시작한지 1년도 더 넘은 1520년 11월 1일, 마젤란 함대는 마침내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해협에 진입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마젤란 해협’으로, 마침 이 날이 모든 성인 대축일이라 ‘모든 성인 대축일 해협(Estrecho de Todos los Santos)’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약 4주 후인 1520년 11월 27일, 마젤란 함대는 마침내 태평양에 진입했다. 그동안 온갖 풍파를 경험한 그는 이 대양을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El Océano Pacífico(태평양)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함대는 약 4개월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했다. 1521년 1월 21일에는 최초로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섬을 발견하고, ‘상어 섬’이라 명명했다. 더욱 서진을 해 2월 4일에는 또 다른 섬에 도착했고, ‘산 파블로 섬’이라고 이름 지었다. 3월 6일에 도착한 섬은 ‘라드로네스 섬( Islas de los Ladrones)’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도둑들의 섬’이라는 뜻이었다. 이는 원주민들이 선단의 물품을 마음대로 가져갔기 때문인데, 사실 원주민들은 물건을 훔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소유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16일, 필리핀 군도 중 하나인 ‘사마르 섬’에 도착했다. 필리핀은 엄청나게 큰 군도라 계속 여러 섬을 탐사했다. 3월 28일에는 리마사와, 4월 7일에는 세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막탄 섬에 도착한 후, 원주민과 싸우는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가 1521년 4월 27일.


마젤란의 전사는 에스파냐로선 큰 손실이었지만, 필리핀 원주민 입장에선 그저 침략자를 죽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젤란을 죽인 추장 라푸라푸는 오늘날 필리핀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선단은 팔라완, 브루나이를 거쳐 향료제도의 티도레 섬, 암보이나 섬, 티모르 섬을 지나 희망봉으로 향했다. 그리고 1522년 5월 19일에 희망봉에 도착했다.


이후 카보 베르데 곶을 거친 선단은 마침내 1522년 9월 6일에 에스파냐로 귀항했다. 이때 선단을 이끈 인물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242명 중 오직 18명만이 살아 돌아온 험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약 3년이나 걸린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는 성공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마젤란의 탐험은 세계지리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항해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명했으며, 태평양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교역로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후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경쟁은 본격화되었으며, 이후 다른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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