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세력이 등장하기 전, 동아시아 바다를 휘젓고 다닌 세력은 왜구였다. 14세기 후반, 원명 교체기에다 일본 남북조 시대의 혼란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왜구가 되어 해적질을 해댔다. 이들의 활동 범위는 한반도 연안, 중국 연안의 대부분으로 그 피해는 막대했다. 고려 후기, 이 왜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건 유명하다.
그런데 왜구의 활동 시기는 크게 전기(14~15세기)와 후기(16세기)로 나뉜다. 시기만 나뉘는 게 아니라, 그 구성원도 나뉜다. 전기에는 일본인들이 많은 반면, 후기에는 한족들이 많았다. 정확히 말해 후기 왜구의 경우 명나라 해금정책을 피한 저장, 푸젠의 한족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여기에 소수의 일본인과 유럽인이 가세한 형국이었다.
한편, 명나라는 해외 세력과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오로지 감합무역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형식상 책봉한 후 감합부(勘合符, 해적과 구별하기 위해 무역선이 소지한 확인 표찰)를 ‘하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나마도 10년에 한 번이라는 엄격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체제는 1404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명나라 건문제 때 시작되었다. 이렇게 공무역을 하는 동안에는 하카타와 사카이 상인들이 참여하는 사무역도 허락되었다.
그런데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센코쿠(전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 지방의 영주들이 득세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사카이를 기반으로 한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구치, 하카타를 기반으로 한 오우치 가문이 독자적으로 견명선(명나라에 보내는 무역선)을 파견해 감합부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 1505년 명나라에선 홍치제가 붕어하고, 정덕제가 새 황제로 등극한다.
문제는 1523년에 벌어졌다. 오우치 가문의 요시오키가 정덕 감합부를 독점한 채 겐도 소츠를 정사로 임명한 견명선을 보낸 것이다. 이에 질세라 호소카와 가문의 다카쿠니는 이미 무효화된 전임 홍치 감합부를 가지고 한족인 쏭쑤칭(宋素卿, 송소경)을 부사로 임명해 견명선을 파견했다. 이때는 이미 정덕제조차 붕어하고, 가정제가 황위에 있을 때였지만, 일본의 경우 10년에 한 번만 무역이 가능했으므로 정덕 감합부는 여전히 유효했다.
1523년 4월, 닝보의 시박사(市舶司, 해상무역 담당 관아)에서 양측 견명선의 감합부 검증이 시작되었다. 오우치의 선단이 먼저 도착했으나, 호소카와 측의 쏭쑤칭이 시박사 대감인 라이은(賴恩, 뇌은)에게 뇌물을 써서 우선 검사를 받았다. 거기다 접빈당 연회에서도 호소카와 측이 상석에 배치되자,
분도한 겐도 소세츠가 무기를 꺼내 호소카와 선단을 습격해 견명선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에 명나라 관헌이 호소카와 측을 지원하게 되었고, 소세츠는 호사카와의 정사인 란코 즈이사를 살해하고 사오싱(紹興, 소흥)으로 도망친 쏭쑤칭 일행을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관리와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소세츠는 결국 배를 훔쳐 바다로 도망쳤고, 선원 중 일부가 서해에서 표류하다가 조선에 붙잡히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중종이었고, 이들을 다시 명나라로 송환했다.
닝보의 난은 중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쑹쑤칭은 체포되어 1524년 옥사했고, 명의 대일 감정이 악화되면서 1529년 닝보 시박사가 폐지되었다. 뒤이어 푸젠, 저장의 무역 거점을 광둥으로 축소시키며 명일 공식 무역을 단절시켰다.
1536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무역을 재개했으나, 1551년 스에 하루타카의 모반으로 오우치 가문이 몰락하며 공식 무역은 중단되었다. 대신 닝보 앞바다의 솽위(雙嶼, 쌍서), 저우산(舟山, 주산) 군도에서 일본 상인과 연안 호족, 관료가 결탁한 밀무역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후기 왜구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명사》는 후기 왜구 중 진왜(眞倭)인 일본인은 3할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한족 등 종왜(從倭)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왕쥐(汪直, 왕직), 쉬하이(徐海, 서해) 같은 한족 해적이 등장했다. 이 사건은 동남왜화(東南倭禍)의 씨앗이 되었으며, 명의 해금 정책과 왜구 문제를 심화시켰다.
닝보의 난은 동아시아 해상사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 포르투갈이 광저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할 무렵, 명의 무역 단절은 밀무역과 후기 왜구의 득세를 부추겼다. 왕쥐는 일본 히라도를 거점으로 명의 해금을 뚫고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와 협력했으며. 이는 오토모 소린이 견명선 명목으로 밀무역과 약탈을 한 사례와 유사하다. 조선이 포로를 송환함으로써 일정부분 이 사건과 연관된 점이 흥미롭다.
요컨대 닝보의 난과 그 이후의 사건들은 동아시아 바다의 혼란과 유럽의 기회를 동시에 드러내며, 대항해시대 때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세력이 얽혀있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