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계엄 선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을 때
나 역시 걱정과 심란함에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글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지냈다.
겨우 마음을 다잡을 즈음
자주 드나드는 단톡방에 링크 하나가 떴다.
https://app.m-nitpick.com/psytest/president
나는 어떤 대통령(지도자)과 비슷한 유형일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라는 이 시기에 딱 눈길을 끌기 좋은 대통령 테스트라는 제목이다.
별생각 없이 클릭했다.
결과는 예상치 않게 박정희 대통령이다.
처음에는 오잉? 했지만 읽어보니 정말 딱 나다.
알고 보니 나
독재자 스타일?
은근히 재미있네? 싶어서
가족 톡방에 공유했다.
가족 네 명 이 모두 다른 결과가 나왔다.
평소 아주 싫어하는 정치인과 일치하는 결과에 심한 불쾌감을 표현하는 막내딸의 진지함에 빵 터졌다. 그런데 불구하고 톡방에는 대부분의 결과에 공감한다는 대화가 한동안 오갔다.
사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대통령 테스트라는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을 뿐
알고 보면 성격 테스트잖아?
오랜만에 성격테스트를 하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 성격은 안 변해. ㅎㅎㅎ
은퇴해도
난 여전하구나.
글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단어는 노력!
그렇다 내 인생을 점철한 단어는
단연코 노력이다.
은퇴한 지금도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면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느낀다.
.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하다못해 정원에 잡초라도 뽑아야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이 편하다.
오랜 세월 나를 다잡고 살다 보니 몸과 마음을 방목하듯 풀어놓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다.
테스트에서는 에둘러 좋은 말로 표현했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나라는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해서 고집이 세고
설렁설렁 대충 하는 사람을 봐주기 힘들어한다.
상대방이 하는 일이 성에 안 차고 믿음이 안 가서
차라리 제가 해버려야 마음이 편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딱 우리 엄마를 닮았다).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주변을 보면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뒤늦게 자신이 어린이다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한다.
극심한 가정불화
부모의 이혼
방임
학대
가난 등
아이는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을 발휘한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둑이
붕괴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마음껏 유년기를 누려야 할 때 너무 일찍 자신을 위해 슬퍼하고, 울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농담도 배우지 못하고 잘 웃지도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의지해야 할 어른의 아픔을 들어주고 기댈 수 있도록 제 작은 어깨를 내준다. 그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쓴다.
나를 일찍 철들게 만든 것은 부모님의 불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장사하시느라 밤늦게 오시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에게 밥을 해 먹였다.
설거지하고
동생들을 챙기고
밤마다 문단속을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불화하면서도 너희 때문에 이혼 못 한다는 엄마를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항상 언니의 옷을 물려 입었지만 한 번도 새 옷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명절이면 종일 엄마랑 송편을 빚고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쳤다.
사는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차라리 이혼했으면'하고 바랄 만큼 두 분은 하루가 멀다고 싸웠다.
두 분이 싸우는 장면을 보는 건 지옥이었다. 깜깜한 동굴 속 같은 내 마음에는 얼음장 같은 칼바람이 불었다. 밖에서는 밝게 웃었지만, 집에 오면 입을 꼭 닫았다.
부모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자청해서 여상을 가겠다고 우겼다(배움에 한 맺힌 엄마의 반대로 인문계를 갔다). 간호학과를 간 이유도 순전히 혼자 서기 위함이다.
철이 들면서는 '결혼으로 인생이 꼬였다'는 엄마의 한탄을 들어주는 대나무 숲이 되었다. 엄마 편에 서서 함께 아빠를 미워해 줬다.
동생들은 때때로 엄마의 속을 썩이며 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부러웠다. 하지만 나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언니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친정에 쫓겨와 있었다(지금은 세 아들의 엄마다). 강철같이 강해보이던 엄마는 매일 울었다.
'나라도 잘해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엄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장학금을 타려고 머리가 터지게 공부했다. 내가 아닌 엄마를 위한 공부였다.
그 시절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나는 엄마의 비타민이었다.
그 결과 '너 같은 자식이라면 얼마든지 있어도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애늙은이로 불렀던 어른들은 이제 효녀라 불렀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매서운 시월드체험을 하느라 잠시 친정을 잊고 산다.
시집에서 분가하자 기다렸다는 듯 친정 식구들이 앞다퉈 울며불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부부 싸움
형제간의 불화
금전적 고민 등 온갖 하소연이
돌림 노래처럼 이어졌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참 이상도 하지.
내 주변에는 기쁨을 두 배로 나누자며 달려드는 사람 대신 내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눠 달라며 죽자 살자 달려드는 사람들로 넘쳤다.
그간 어른아이로 사느라 애썼지?
고마웠다.
이젠 그만해도 돼라는 말 같은 것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사이에 나는 상담가이자 해결사가 되어있었다.
믿는 자식으로 자란 어른아이는 부모들이 평생 옆에 끼고 살고 싶은 자식이다(시부모가 그랬듯 친정엄마 역시 우리 부부를 옆에 두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어른이 된 어른아이에게는 이상한 일이 계속 벌어진다.
오래도록 해결사 노릇을 했지만 정작 달콤한 열매를 나눌 순간이 오면 뒷전에 밀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너는 어떤 일이 닥쳐도 잘 살아낼 것이니 걱정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부모가 챙기는 우선순위는 걱정거리 자식이고, 다음은 큰 목소리로 자기주장을 하는 자식이다.
어느 날부터 도움 청하는 말들에 점점 짜증과 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주려 애쓰지만 정작 내가 힘들 때는 여간해서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내민 내 손을 선뜻 잡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어린 시절에 자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온 동생에게 몇십 년 만에 뜻밖의 말을 들었다.
누나!
누나 덕분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렇게 엉망인 집안 분위기에서도
누나가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더라?
그랬구나!
내가 집 근처 대학에 입학할 당시
남동생은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었다.
동생은 그즈음 공부에 손을 놓고 방황하고 있었다.(가난 속에서도 부모님은 우리를 세상 풍파로부터 지켜주셨지만 정작 마음 건강은 지켜주지 못했다. 우리는 부모의 불화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고, 훗날 나를 제외한 형제들의 마음은 크게 아프게 된다. 우리는 저마다 비슷하고 다르게 그 시절을 기억하며 아파한다.)
전혀 몰랐었다.
동생이 나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 힘을 냈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워.
내 동생.
그러고 보니
언젠가 막냇 동생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당시 집안에서 대학생이 나온 게 기적 같았다고
부모가 불화하는 가정에서 어른아이로 자란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동생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래
그 시절 누나가 누나를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누나가 어른아이였어서 참 다행이야.
고맙게도 동생은 잘 풀렸다.
간혹 이런저런 일로
티격태격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어른아이는 힘겨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택할 수밖에 없는 최선책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방법을 찾아내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덕분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등에 진 무거운 짐의 무게 덕분에
인생이라는 세찬 물길을 건널 때
오히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았다.
그때 그 어른아이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가족들의 든든한 상담가와
중재자 역할을 하는 내 삶이
심하게 버겁게 느껴졌다.
나까지 그만두면 이 둑이 무너질까 봐 그간 기를 쓰고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무너질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 순간은
양가 모두 내 역할을 너무나 당연한 듯 여길 때 찾아왔다.
너무 열심히 살았을까?
어느 날부터 극심한 이명이 찾아왔다.
이유 없는 불안이 엄습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통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원치 않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자유를 선물하고서야 그 증상들은 서서히 나를 떠나갔다).
결국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야 한다. 나는 해결사 노릇을 멈추고 더 이상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놓기로 했다.
때로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남은 시간을 더 오래오래 견딜 수 있다.
결국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때마침 남편이 아팠고
우리는 귀촌을 선택했다.
자연스럽게 양가 가족들로부터 심리적, 물리적으로 한 발 떨어질 수 있었다.
어른아이로 자란 어른의 마음속에는 '항상 최선을 다해 달려'라며 혹독하게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이 산다.
그간 나는 내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견고한 틀을 만들고 그걸 지켜내려 애썼다.그리고 한때 그것들은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전하다.
나는 지금 그것들과 이별을 선언하고
통제의 지옥에서 벗어났다
아팠던 과거도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소중한 인생의 한 부분이다. 따뜻하게 품어주면 좋겠다.
인생 스토리를 다시 쓰기에 늦을 때는 없다.
더구나 백세시대다. 아마 나에겐 앞으로 몇십 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이만하면 충분한 시간이다
인용: 나는 내가 먼저입니다 / 매일경제 신문사 / 네드라 글로버 타와브 지음
* 나는 주변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1.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2. 종종 그렇다.
3. 그렇지 않다.
나는 내 한계를 잘 알고 있어서 되도록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제안한다.
1. 경직된 바운더리
2. 허술한 바운더리
3. 건강한 바운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