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애가 당부해서 될 일인가?
젊은 시절 시어머니께 세배드리면
제일 많이 들었던 덕담 중 하나가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형제간에 우애!
그게 당부해서 될 일인가?
그간 양가 부모님들에게 다른 형제들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칭찬과 자랑을 들었다.
내 형편이 괜찮을 때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럼 나는 뭐로 기쁘게 해 드리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기뻤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을 때는 별생각 없이 하신 부모님 말들이 불편하다 못해 비수처럼 아프게 꽂혔다.
가장 최고봉은 지랑을 동반한 비교다.
신혼 시절 시부모님 결혼기념일 날 즈음! '동생은 00을 해줬는데 너희는 뭐냐?'라고 불같이 화를 내시는 시어머니 전화에 남편은 엄청 자존심이 상했다.
그달 월급을 탈탈 털어 송금하면서 어찌나 속상하고 화가 나던지. ㅠㅠ( 대놓고 부모의 사랑을 두고 자식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상황에 부닥치면 처음부터 말려들지 않는 게 답이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된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언니의 목소리!
미치겠다. 그렇게 말려도 엄마는 매번 언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칭찬을 하셨다.
엄마에게 '우리 큰딸 같은 딸을 100명 갖고 싶다'는 칭찬을 못 듣는 언니는 마음을 몹시 다쳤다. 소심한 언니는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싫다는 말을 그 자리에서 못 한다. 대신 두고두고 원망을 이어간다.
언니가 전화 말미에 덧붙인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자식은 너야.
이 말은 '나, 마음 아파'라는 뜻과 동시에 다르게도 들린다. '알지? 그러니까 너 앞으로도 집안에 일이 생기면 계속 책임져!'.
한다고 열심히 했지만, 나도 모르게 지은 죄!
언니보다 더 사랑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언니(장녀)의 자리를 빼앗은 죄!
그 죗값을 계속 치르라는 무서운 말이다.
한 자식 앞에서 또 다른 자식에 대한 자랑이나 칭찬은 형제간에 불화의 씨앗을 심는 일이 될 수 있다.
부모님의 불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언니다.
언니는 생김새와 성격이 아빠를 유독 많이 닮았다.
엄마는'하는 짓마다 딱 제 아비'라며 언니를 자주 타박하셨다. 게다가 배움이 느린 것(그건 결코 언니 잘못이 아니다)도 타박을 듣는데 한몫했다
반면 나는 성격도 하는 짓도 심지어 체질까지 엄마를 빼닮았다. 일 욕심이 많은 엄마 마음에 쏙 드는 짓으로 늘 칭찬을 받았다.
어려서는 엄마의 말이 얼마나 언니에게 상처가 되는지 몰랐다.
운 좋게 엄마를 닮아 설화를 피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교만하고 미련한 나는, 결혼 후 큰며느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장녀(장자)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동생들이 언니(형)를 함부로 뛰어넘도록 부추기고 방관한 부모에 대한 서운함과 뒤따르는 무서운 부작용을 알게 되었다.
부모가 되고 나서야 동생들과 비교당하며 자라야 했던 어린 언니가 느꼈을 뼈가 시리게 아픈 마음과 부러움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언니는 가정불화의 가장 큰 희생양이다.
어린 날의 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나는 언니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비슷한 일은 시댁에서도 벌어졌다.
신혼 초 나는 같이 살자는 부모를 뿌리치고 나온 죄 아닌 죄를 짓고 힘들어하는 불효자 남편님을 보고 사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바로 시댁으로 퇴근했고, 월요일이면 새벽에 일어나 네 번을 갈아타고 두 시간여 거리의 서울로 출근하곤 했다.
연탄보일러를 땠던 시절, 집에 오면 항상 연탄불이 꺼져있었다. 마당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번개탄에 불을 붙여 연탄불을 피우는 게 퇴근 후 내가 하는 첫 번째 일이었다.
따로 살지만 머릿속은 늘 시부모님과 동거 중이었다.
그렇게 나 하고 싶은 것보다 시부모님 심기를 우선하며 살다 보니 첫아이를 낳고 나서 만점짜리 며느리로 등극하게 되었다('너는 시부모에게는 만점인데 시누이에게 빵점'이라고 혼난 날 본의 아니게 내 점수를 알았다. ㅎㅎㅎ).
그러나 1등의 자리는 항상 위태로운 법!
나는 어느 날 시누이의 말 폭탄을 맞게 된다.
엄마 아버지는 언제나 큰아들(큰며느리)만 든든하대요.
큰아들(며느리)만 최고라는 말!
들을 때마다 나랑 내 동생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나 해요?
그깟 부모 모시는 거?
나도 할 수 있어요.
마치 실컷 주고 도리어 뺨을 맞은 얼얼한 기분이다.
양가의 든든한 자식(결혼을 안 했어도 그 역할을 하는)으로 살아본 사람은 말 안 해도 안다. 그런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고단한 일인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 부모에게 계속 그런 말을 들어야 했던, 언니와 시누이의 마음도 이해 된다.
'너희들 덕분에 든든하다'라는
칭찬이면 너도, 나도 얼마나 좋을까?
형제들은 믿으려나?
나도 '나만 믿는다'는 말이 싫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질투를 유발하는 칭찬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게 칭찬이 아니다.
부담스럽다.
언니는 심성이 고왔다. 결혼 후 살림이 나아지자 젊은 날 고생한 엄마에게 잘하려고 애썼고, 우리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들 가정을 일군 후에도 엄마의 언니에 대한 배려 없는 동생들의 칭찬과 자랑은 계속 이어졌다.
엄마의 자랑은 별 의도가 없어 보인다.
그저 뿌듯해서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이다.
평생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엄마다.
남편과의 불화 속에서도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는 자부심 하나로 사셨다. 특히 그 와중에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평범하지만 엄마에겐 대단한)을 간 나와 남동생은 생각만 해도 기특한 효녀(효자)다.
그러나 대학을 못 간 언니는 그 기특한 자식 대열에 끼지 못했다. 대신 두 동생이 어떻게 사회에서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지 엄마의 자세한 중계방송을 들으며 살아야만 했다.
물론 우리도 언니에 대한 자랑과 칭찬을 수 없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니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없다.내 상황이 나빠도 그쯤은 얼마든지 듣고 넘길 수 있었다.
언니 속이 시끄러울때 듣는 동생들에대한 칭찬은 언니의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했고, 결국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가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수시로 언니는 토라졌고 토라잠이 반복될수록 그 기간은 점점 길어졌다. 처음에는 몇 달, 이제는 해를 넘긴다.
언니가 토라질 때마다 결국 중간에서 푸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엄마의 자랑질을 말리고 언니를 토닥이며 몇십 년을 살았다. 반복되는 상황에 이제 나도 지쳐서 그냥 내버려두는 중이다.
언니가 겨우 풀릴만하면 엄마도 모르게 말끝에 묻어나는 동생들에 대한 칭찬! 결국 상황은 또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이 드신 엄마는 이제 어느 지점에서 어떤 말로 딸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는지조차 알지 못하신다.
자꾸 토라지는 큰딸!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는 엄마.
언니가 원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엄마의 따뜻한 위로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엄마가 상처 주고 편애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어린 내 눈에도 어렴풋하게 편애로 느꼈던 그 상황. 그러나 생존을 위해 모질고 어려운 시대를 통과했던 엄마다.
'힘들게 살아내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그 시절 어느 집에나 흔한 일'로 여기 신다.
오히려 노여워하신다.
'내가 너희들 버리고 갔으면 다~ 공장갔어!'
맞다.
그랬을 거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엄마에게 아버지를 닮았다며 혼나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당하는 설움을 겪지 않았다.
엄마는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언니와도 그럴까 걱정이다.
부디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언니의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아픔을 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큰딸이 앞으로 살아갈 남은 날들을 위해...
부모의 사랑을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를 죽이고 최종 승자가 된 조선시대 태종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형제는 한 뱃속에서 나와 한정된 부모의 자원과 사랑을 두고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얼마 전 막내딸과 대화를 나누던 말미에 '언니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효도'라는 말이 또 나오고 말았다.
딸이 '엄마! 나한테도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효도라고 말해줘'라고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았다.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 막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효도지!
바로 말을 이었지만, 아무리 서른을 훌쩍 넘겨도 언니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고파하는 딸의 모습에 순간 마음이 찡했다.
자랑이라는 형식을 빌려 은근한 비교와 차별로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할퀸 부모의 잘못이었다.
비교와 경쟁을 당하는 형제들 간에
우애!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양가 부모님들은 칭찬을 받아야 할 당사자 앞에서는 칭찬을 아꼈다가, 꼭 다른 자식 앞에서 자랑하시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부모들을 거울삼아 살아간다.
자식을 칭찬하고 싶을 때는 칭찬받아야 할 당사자에게, 다른 형제 앞에서 하고 싶은 자랑까지 모두 당겨와서 칭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마음먹어도 자꾸 실수하는 게 나다.
내게는 맛난 것을 앞에 두거나 좋은 곳을 가면 남편이나 자식들이 떠오르는 병이 있다.
얼마 전에도 '맛난 음식을 차려놓고 언니(동생)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걸!'이라는 말로 딸에게 한 소리 들었다. 그 말은 나랑 합작해서 딸을 만든 남편에게나 가능하다는 걸 또 깜빡했다.
우애는 '우애 있게 지내라'는 부모의 말이 아니라
'우리는 경쟁자가 아닌 한편'이라는 생각,
'부모는 우리를 공평하게 사랑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경험들이 차곡차곡 서로의 몸에 쌓일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이 꽃은 이래서 세상에서 제일 예뻤고,
저 꽃은 저래서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제철을 맞아 피어나는 꽃들은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게
저마다 아름다웠다.
채송화 앞에 서면 채송화가 세상 전부처럼 여겨져 장미가 아예 떠오르지 않았고,
장미 앞에 서면 장미가 세상 전부처럼 여겨져 채송화가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꽃들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라고 서로 다툴일이 없었다
그때 알았다.
자식들도 그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속으로만 생각하려고 늘 노력한다.
이 애는 이래서 고맙고.
저 애는 저래서 고맙고.
가지가지 때깔별로 좋은 것을 누리는 나.
얼마나 행복한 부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