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헤르만 헤세
나는 타인에게 나를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이런 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말해서 누군가는 당혹스러움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이렇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지성인의 탈을 쓰고 진실을 말하고, 종교인으로서 신이 주신 미덕을 옳은 것이라 믿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지만, 거짓과 위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내 모습을 볼 때 마치 벌거벗은 듯 수치스럽고 때로는 죄책감과 좌절에 이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유년시절부터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 내적 갈등은 늘 나를 괴롭혔다. 모두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 외칠 때, 그와 대비되는 내 어두운 면을 숨기느라 애썼고, 늘 불안하고 무력해졌다.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불안감과 좌절감의 돌파구를 나 스스로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이를 극복해 나감에 있어 내 노력의 결실들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옳은 것'이라고 믿는 선한 것들로 가득한 세계에 내가 소속되어 있길 원하고, 그 세계에서 '바람직하다'라고 간주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비되는 내 모습을 보기 때문에 죄책감, 무력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치부가 들킬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나의 어두운 모습들은 그렇게 내 내면의 고민으로만 깊게 뿌리를 내려갔고, 내 무력감을 달래줄 방법을 꽤나 긴 시간 동안 찾지 못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도, 그 역시 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내 불안감을 책으로 달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려웠다. 마음의 위안을 주는 글들은 많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그날도 내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서점에 들러 처방약을 찾는 기분으로 책더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인 듯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잡았고, 초반 몇 페이지를 읽고 그 길로 책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소설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년 시절에 경험한 처절한 양심의 고백과, 내면의 독백은 마치 내가 늘 외치면서도, 아무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던 말들 같았다.
한 세계는 선한 것만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올바르다'라고 교육받은 것들로 만들진 세계이다.
다른 한 세계는 그러한 세계에 소속되지 못한 추악한 것들이 가득하다. 우리 자신이 마음으로는 느끼지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악한 세계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그 두 세계를 살아가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고뇌와 번민과 좌절을 경험한다.
우리는 누구나 선한 세계에 소속되고 싶어 하지만, 끊임없이 악한 세계에 놓이는 자신을 보며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때로는 순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믿고 사는 세계는 반쪽에 불과하다. 영원한 선은 없다. 바뀔 수 있다. 상대적이다.
선한 세계만을 '신'의 영역으로, 그 외의 세계를 '악마'의 영역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선'을 '신'의 세계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반대로 '악'또한 신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에 앞서,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물어 의심하도록 하는 것. 소설 속 주인공인 싱크 레어의 친구 데미안이 그에게 준 조언이다.
이는 악한 것도 서슴지 않고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남들이 정해둔 세계에 갇혀 자신을 구속시키지 않고, 달리 볼 수 있어야 한다.
용기 내어 비판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끔찍한 비극은 모두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자행했을 때에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 나치의 유대인 학살
모두가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선하다 판단한 행동이 얼마나 추악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신은 왜 우리에게 악한 모습을 함께 주셨을까?
선과 악의 두 세계 안에서의 투쟁을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신은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신의 두 모습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두 세계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은, 모든 영감의 근원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