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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bbie Oct 01. 2023

누가 가난을 훔칠 수 있을 까.

<도둑맞은 가난> 박완서

‘지독한 가난 뱅이’에게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훔칠 수 있는 것이 과연 남아 있기는 할까 하는 우려로 책을 열었다.


순임이는 풀 빵집에서 만난 상훈이와 월세와 생활비를 아끼려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훈이를 좋아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언젠가 고백을 들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밝은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아빠의 퇴직, 몇 번의 사업실패로 달동네로 이사 온 그녀와 가족. 가난을 부끄럽게 여긴 엄마, 아빠, 오빠는 모두 자살을 선택했다. 반면 순임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떳떳하고 용감하게 가난을 지키며’ 살아가는 던 중 상훈이를 만난 것이다. 사업장에게 폐병이 걸린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었다는 말을 듣고 가난한 사람은 서로 도와야 한다며 위로금을 모으자는 따뜻한 순임이.


상훈이는 둘이 모은 전 재산 3만 원(영화는 5만 원)을 주었고 둘은 격렬하게 싸운다. 순임이는 3만 원을 ‘헌신짝 버리듯 무심히 그냥 버린’ 상훈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이었다. 며칠 후부터 상훈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는 부잣집 아들에게 가난을 경험하려고 부모님이 보냈다는 말을 전한다. 

순임이에게 이곳은 살 곳이 아니니 심부름꾼 제안을 하자, 순임이는 욕설과 발악으로 응대한다.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무시당한 것이다.

상훈이가 떠난 후 집안 살림살이에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가난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당히 가난과 맞서 살던 그녀의 삶은 부끄러운 것인가. 배우자를 만나고 양장점을 내려는 꿈은 모두 덧없는 것일까.


비록 가난하다고 조롱을 받았지만 삶의 무게를 당당히 지고 있는 그녀야 말로 ‘희망 부자’ 아닐까.

없을지라도 남을 도와주며 사는 모습과 ‘마지막 한 냥’까지 가지려는 욕심이 비교되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는 부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p.33


부자가 가난을 도둑질하다. 발상이 새롭고 섬뜩하다. 가난은 조롱이나 경시의 대상이 아니다.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 가난은 살아가는 매일이다. 문제는 부자의 시선에서 볼 때 잘 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상훈이는 가난을 훔치는 대는 성공 했을지라도 인생과 치열하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폐병 걸린 아이에 대한 연민도 없고, 연탄을 아끼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부끄럽다고 말한 이. 돈을 건 낸 이유는 위로의 다른 이름이고, 같은 이불에서 지낸다는 건 좋아한다는 의미라는 기본 마음 읽기도 못하는 그가 훔쳐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을 경험하고자 하는 그는 ‘감정의 가난’ 상태가 아닐지.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 소명이다.’ 그녀의 말이 전해진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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