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당 Nov 23. 2021

집 계약서 쓰던 날

거짓말 같겠지만 열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오전, 회사 고양이들 밥을 그득하니 챙겨주고는 부리나케 은행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자기앞 수표”라는 걸 받아 들고는 숫자 뒤에 붙은 '0'을 열심히 세어본다. 참 많기도 많네.


하필이면 오늘, 가랑비가 내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은 몰라도 돈 젖는 줄은 알아야겠다 싶어 안주머니 깊숙이 봉투를 넣는다.


아침까지만 해도 유명하다는 수제비 집에서 든든하게 한 끼 먹어 볼까 했었는데, 이미 너무 지쳤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선 가게의 순두부찌개 한 그릇은 다행히도 정말 맛있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바쁜 나의 배우자. 나도 너도 금요일 오후에 시간 조금 낸다는 게 이토록 힘든 삶을 살고 있구나.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 서류 속 문장의 조탁(彫琢), 그리고는 품고 있던 수표를 내어드린다. 그렇게 집 계약서를 썼다.


부동산 앞에서 서로 작별 인사를 했다. 무슨 마음인지 모를 마음을 가지고 '우리 동네'를 빙빙 돌아보다 그 집 앞에서 우연히 다시 어르신과 마주친다. 정말 많이 빙빙 돌았는데, 그런데도 마주친다. 그렇게 ‘우리 집' 마당에 처음으로 들어서 본다.


긴장, 초조, 걱정, 두려움, 어쩌면 약간의 기쁨. 하지만 무엇보다 정 붙이고 살던 동네를 곧 떠나야 함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이내 옮겨오는, 평생을 보낸 동네를 떠나실 분의 마음. 기쁘다고 할 수도, 슬프다고 할 수도, 어떻게 표현을 하기에도 어려움이 크기만 한 날이다.


분명 힘든 날이었음에도, 돌아오던 길 창덕궁 담장 너머의 비 갠 하늘빛도, 그리고 그때 즈음의 내 마음도, 분명 참 좋았다.


2021.05.21. 삼청동 한옥 매매 계약


에든버러(2020), Pentax MX/Kodak Portra 40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