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by 장예만

1978년 시카고에서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성경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교훈으로서 믿어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순종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총체적인 신적 무오성(無誤性)이 어떤 형태로든 제한되거나 무시된다면 성경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뿐 아니라 성경 자체의 증거와는 상반되게 성경의 권위는 진리의 견해에 대하여 상대적이 된다. 이러한 과실은 개인과 교회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역으로 보면, 개인과 교회에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면 성경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아야 하고,

성경이 권위 있는 것은, 성경에 쓰여있는 내용이 전부 하나님의 교훈이고 명령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에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금이 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전하는 교회는 심각한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불경은 부처님 말씀이고, 논어는 공자 말씀이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굳이 왜 이런 선언문을 발표했을까요?

다른 경전과는 달리, 성경에는 온갖 믿기 힘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에 성경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확실히 해두기 위해 발표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실하니 딴 소리 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의 문제를 지적하며 더욱더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일개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앞뒤가 맞고, 받아들일만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궁금해서 질문을 하면 정확한 답변(물론 인간이니 그럴 수 있지만)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로 시작하는 모든 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들었다고 말하는 선지자나 왕은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리는 없습니다.

기도 중에, 생각하던 중에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

직접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각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이냐 하는 것입니다.


'따르르릉' 한참 자고 있는데 새벽에 전화가 걸려옵니다.

'집사님, 저 아무개 권사인데요. 제가 새벽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집사님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전화를 했어요. 아무 일도 없으세요?'

'네, 없는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기도를 해드릴게요'

새벽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자는 사람 깨워놓고 기도를 해줍니다. 그것도 방언이라는 것으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마치 무당에게 신이 무슨 점지를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다는 거지요.

저는 둘 다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머리에 떠 오른 생각은, 그저 자신의 생각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떠올려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요 음성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계시나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래를 가르쳐 주고,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소원을 말하면 막 들어주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 하나하나가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독교가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모순이 너무 많으니까요.

하나님을 자기에게 이익을 주시는 분으로 여기고 섬기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 모순에 의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일례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맡긴 것이지요.

인간에게 세상을 맡겨 놓고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은 자체 모순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사사건건 간섭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서 역사를 행하십니다.

세상 만물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바뀌어버리죠.

말도 안 됩니다.


인간인 제가 감히 하나님께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 이스라엘 편에만 서 계셨습니까?"라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따질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뭘 잘못하셨어야 따지지요.

그저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자기만의 신으로 만들어 놓고 벌인 작태에 기독교인들이 놀아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에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며 찾아보다가 보게 된 글을 소개합니다.


ㅇ 대구 샘터교회 정용섭 목사 : 성서 텍스트는 ‘문자’다. 문자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 성서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호다. 지시하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보기 어렵지만 손가락에만 머물러 있어도 달을 못 보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다. 문자, 또는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세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어 문자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게 궁극적인 진리 앞에서 선 인간의 딜레마다. 설교자도 똑같은 딜레마에 놓여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성서라는 문자만 앞에 놓여 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 경험의 깊이에 따라서 설교의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의 깊이에 대한 생각 없이 청중들에게만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마치 성악가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한 음악적 깊이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포퓰리즘은 대중 가수들에게나 어울린다. 설교자에게 청중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청중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중들의 호응 현상에만 매달리면 설교자의 영혼은 메말라간다. 영혼이 메말라 가는 설교자는 시간이 갈수록 청중들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결국 설교자도 죽고 청중들도 죽는다.


ㅇ문자 주의(위키백과에서 발췌함)

성경 문자 주의(聖經 文字主義, 영어: Biblical literalism 비블리컬 리터럴리즘[*], biblicism) 또는 성서 문자 주의라는 용어는 성경의 문구 그대로를 따르자는 기독교 성경 이해 방식 중 하나이다. [1] 근대에 와서 기독교 개신교 보수주의의 성경 이해로 활용되며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경 해석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정확한 문자나 문자적 의미를 고수하는 문자 주의라는 사전적 정의와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는데, 여기서 문자적이라는 것은 비유나 은유가 아닌 단어나 단어들의 주요하고 엄밀한 의미에 관여하고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온 모든 기록을 역사적 배경이나 그 의미가 아니라 문자에 기록된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극단적 성경 이해 방식이다.


성경 문자 주의는 축자영감설과 연관되어, 모든 성경 구절과 단어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개념을 따른다. 개신교 종교개혁 사상을 따르는 신학계의 역사적 성경 해석과 그 맥을 달리 하며, 서방교회의 중세적 알레고리 성경 해석의 일종으로 구분된다. 역사적 성경 해석은 반드시 성경 본문의 상호 구성과 연계, 시대적 배경에 따른 의미를 추구하므로 모든 성경의 문장의 의도와 표현 방식에 따른 의미 변화와 비유, 은유, 수사적 표현을 구분한다. 반면, 성경 문자 주의는 성경의 문자 기록만을 절대화하여 역사적 배경과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역사적(無歷史的) 성경 이해와 문자 그대로의 적용을 주장한다.


성경 문자 주의는 본문의 문자 그대로의 성경을 따르는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문자 주의가 주장하는 본문의 무역사적(無歷史的) 적용을 위해서는 필요한 주제에 성경 문구를 맞추는 작위적 성경 본문 취사선택이 필연적이다. 결국 축자영감설에 따른 성경무오설을 강화하는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성경 문자 주의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따르는 종교개혁 사상의 성경 이해와 대립한다.


정통 개신교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성경 해석에서 발전한 성경 신학에 따라, 성경 본문은 역사적 배경과 문헌적 의도를 지니므로 특정 주제에 대해서 전혀 반대되는 주장이 존재하며, 같은 인물을 전혀 다른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선행의 중요성을 부차적이라고 주장했으나, 야고보는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의 다윗 왕은 '사무엘기 하'와 '열왕기 상'에서는 비판적으로 묘사되나, '역대지 상'에서는 위대한 왕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내용의 차이와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성경 문자 주의는 역사적 성경 해석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개혁 사상에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2] 대부분 정통 개신교 신학에서 벗어나려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이해 방식이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그냥 믿고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파고들어야만 합니다.


목사도 신학자도 아무 것도 아닌 저는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비판을 각오하고

이제 두려운 마음으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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