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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May 10. 2022

선생님다운 선생님, 그렇지 못한 선생

# 당시에는 평범한 선생님들

모든 엄마가 다 그렇듯이, 제 엄마도 저를 잘 키우고 싶으셨습니다.

유일한 자신의 희망인 제가 잘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 때,

반장을 했는데 소풍날엔 반장 엄마가 선생님 도시락을 싸와야 했습니다.

엄마는 길이 아주 좋아진 현재, 제 걸음으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선생님들과 제 도시락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셨었습니다.

소풍 장소는 '옥천사'라는 절 근처 산이었고, 집에서 부터 오는 길에는 가파른 오르막 네 개를 넘어야만 했었죠.

점심시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반장들이 싸온 것을 모아 놓고 식사를 하셨었기에

제 담임 선생님은 그것을 얻어(?) 드셨죠.

저는 엄마를 목이 빠지게 초조하게 기다리며 굶고 있었고요.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 한참 후에야 엄마께서 오셨습니다.

뭘 그리 많이 장만하셨는지. 엄마의 음식 솜씨는 단연 최고입니다.

하지만, 그 음식은 대부분 다시 싸가야 했었죠.

당시에 저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과 고마움보다는 속상함이 더 컸었네요.

선생님은 엄마께 괜찮다고 했는데...

선생님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엄마에 대한 얘기를 썼네요^^.

제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로 차 있어서인가 봅니다.


육성회비를 내야 할 날짜가 지나면,

"육성회비 안 낸 사람 일어서. 왜 육성회비를 안내. 뒤로 가서 서 있어"


군사부일체인데. 당시에는 선생님이 부모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는 항상 약자.


# 나쁜 선생님들

1.

"장훈이 엄마가 촌지를 잘 줘요."

"아. 그래요?"

국민학교 6학년 올라갈 때, 5학년 담임과 6학년 담임이 하는 얘기를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당시에는 불법이 아니었던 촌지를 엄마는 주셨었나 봅니다.

집은 빚이 늘어가고 있는데도...

저는 제가 공부를 잘해서 반장을 하는 줄 알았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죠.

집에 가자마자 엄마께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앞으로 학교에 오지 마세요. 선생님에게 촌지도 절대 주지 말고요."(사투리로 했는데 표준어로 고쳐 씀)

5학년 담임은 그 이후로도 가끔 집에 왔습니다. 촌지를 바라고...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주셨죠. 또 말씀드렸습니다. "주지 마세요. 그러면 저 학교 못 다녀요"

그 후로 담임의 가정 방문은 끝났습니다.


문제는... 졸업할 때 교육감상, 교육장상, 도지사상, 교장상, 교감상, 전남매일 사장상  등등의 상들을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줬었는데(부상도 있었죠),

저는 전교 2등이었는데 가장 하급인 전남매일 사장상을 받고, 저보다 훨씬 공부를 못해 반에서도 10등 안에 들지도 못한, 저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주인집 아들이 2등 상인 교육장상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울면서 집에 와서 말했죠. 아버지는 학교로 가셨습니다. 담임으로부터 들은 말은

"성적만 아니라,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은 점수가 더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였죠.

돈 없어서 웅변학원에도 다니지 못하면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된다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었습니다.


2.

고등학교 1학년.

버스 한 대를 놓치면 지각은 따놓은 당상이었었죠.

버스는 항상 콩나물시루보다 더 빽빽할 정도였으니 지각을 하지 않으려면 등교시각 보다 빨리 집을 나서야 했죠.

지각을 하면, 담임으로부터 긴 몽둥이로 엉덩이 찜질을 제대로 당해야 했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교련 선생은 참 무서웠었습니다.

강호동에 필적할 만한 덩치였죠.

군인도 아닌 학생이 제대로 하지 못할 수 있음에도,

줄줄이 엎드려뻗쳐를 시킨 후 그 덩치로 엉덩이를 밟고 지나갔었습니다.

한 번 밟히면 '악' 소리가 절로 나왔죠.

이 선생은 자랑스럽게 말했었습니다. "내 자식이 어린데, 말을 듣지 않으면 던져 버린다."

"이런 미친"(속으로만 외쳤습니다.)


나머지는 생략^^


# 참 좋은 선생님

오대교 선생님. 큰 대자에 가르칠 교.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이름을 지어 놓고 그 이름에 맞게 잘 키우셨음이 확실한 분이셨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죠.

교탁에 교과서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교탁을 짚고 엉덩이를 뒤로 쭈~욱 뺀 채로 수업을 하셨었습니다.

(꽤 뚱뚱하신 편^^)

선생님다운 선생님이셨죠.


집이 가난해서 서울로 갈 수는 없기 때문에(생활비를 마련할 수 없으니까요. 당시에는 대학생 과외 금지 제도가 있었습니다. 참 인생 안 풀렸죠) 지역에 있는 두 대학교 중 더 나은 대학교 의과대학을 학력고사(당시에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치른 시험) 점수가 나오자마자 떨어지든 말든 무조건 일착으로 지원하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A대학교 의과대학은 서울에 있는 웬만한 대학교보다 합격선이 높았고, B대학교 의과대학은 A대학교에 합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지원할 만큼 당시에는 격차가 컸었습니다.(그때는 오직 한 대학교에만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서울대와 지방의 어느 대학 차이였죠.


드디어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잘 나왔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집에 가자마자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원서 접수 첫날 A대학교 의과대학에 지원서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라고 했던 아버지는 다음 날 저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대학교를 가든지 의사만 되면 되는 것 아니냐"

등록금을 내 줄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적이 아주 잘 나왔으니 B대학교 의과대학을 지원하면 전액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는 순간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느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죠.

그리고, 너무 쉽게 결정해버렸습니다.

돈이 없다는데 제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엄마의 사촌 동생인 외당숙께서 이 소식을 듣고 집에 오셨습니다.

"네가 A대학교 의과대학에 가면,  네 학비도 대주고 너희 집 빚도 갚아주고 집도 사 줄 수 있는 돈 많은 집을 알고 있으니 소개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지원해라"

모든 고생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자존심이 결정적인 순간에 툭 치고 나와버렸죠.

팔려가기 싫었습니다.


원서 지원 첫날(당시에는 며칠간 원서 접수 기간이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B대학교에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B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다녔었습니다.

B대학교에는 부속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우수한 학생을 B대학교에 입학을 시키는 담임 선생님에게는 고과 점수를 높게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선생이라면 어떻게든지 자신의 고과 점수를 위해 학생들에게 그 대학교의 좋은 과를 권유하는 분위기였죠.

선생이라면 뛸 듯이 기뻐하면서 "그래 잘 생각했다. 거기 가면 학비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며

바로 원서를 써줬을 것입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선생이 아니라 선생님이셨습니다.

깜짝 놀라시며 절대 못써준다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말씀드려도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하셨습니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아버지 40살에 태어나서 지금 아버지 연세가 60입니다. 몸도 많이 좋지 않으시고요. 제가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효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써주십시오"

이 말에 담임선생님께서는 결국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의 도장이 찍혀야 원서 접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나?)


저보다 학력고사 점수가 10점, 12점 덜 나온 친구들은 A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고,

저는 B대학교 의과대학에 수석 합격하여 등록금과 2년간의 납부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수련을 받고, 군대에 갔다 와서 20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개업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오대교 선생님을 찾았죠. 부속 고등학교에서 부속 여자고등학교로 옮겨 계셨습니다.

전화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을 텐데 저를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개업했으니 진료받으실 일 있으시면 오시라고 했습니다.

너무 반가워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오셨습니다.

오셔서 저를 보시자마자 하신 첫마디. "아버지 아직 살아계시냐?"

"네. 살아계십니다."

"아이고. 그렇구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데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가 나와 버린 거죠.

그만큼 참 좋은 선생님.

오대교 선생님은 15년째 저에게 진료받으러 오고 계십니다.

여전히 인자하신 모습으로, 살은 많이 빠지셔서 오동통한 정겨움은 사라졌지만...

은퇴하셨지만, 시인으로 시집도 내시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 판을 치더라도

참 좋은 몇 명만 있으면 아름답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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