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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y 10. 2022

꼴뚜기 왕자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직 교사를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별명이 아직도 꼴뚜기 왕자인지도 궁금하고요.


아, 선생님의 별명이 왜 꼴뚜기 왕자냐고요?  

애들이 선생님 얼굴이 만화 둘리에 나오는 꼴뚜기 왕자와 무척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실 주인공만 기억하는 스타일이라 꼴뚜기 왕자가 둘리에 나왔는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인상 쓴 모습이 닮은 듯도 하고요. 그러나 오징어든 꼴뚜기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외모보다는 인품이 중요하지요.  

꼴뚜기 왕자 (아기공룡 둘리)


선생님과 저와의 악연은 제가 고1 때 전학을 가던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저는 걱정도 하였지만 내심 기대하였습니다. 전학생이 왔다고 하면 반 애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말도 먼저 거니까요.


저는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 인기 있는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초 5~6학년에는 왕따였고 중학생 때는 친구가 적은 학생이었어요. 저의 첫인상이 별로였는지 아니면 성격이 별로였는지 몰라도 애들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심이 통하는 친구들이 생기더군요. 여러 명이 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에게 가장 친한 친구 1~2명은 남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친구들을 사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어오길 바라기보다 제가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갔지요. 그 덕분에 한 달 만에 같은 반 대부분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격까지 바꾸어 가며 사귄 친구들과 헤어져 4월에 전학을 가게 되었지만, 저는 새로운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꼴뚜기 왕자 선생님이 저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기 전까지는요.

"우리 반에 공부 잘하는 학생이 전학 왔다. 모두 경계하고 공부 열심히 하도록."


네? 이렇게 전학생을 소개한다고요? 제가 뭐, 어디 외부에서 침투한 스파이인가요? 저를 왜 경계해요?

제가 봤던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제법 높았나 봐요. 그렇다고 엄청 좋은 성적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니, 좋았다고 해도 그렇죠. 누가 그따위로! 그딴 식으로! 그렇게 소개를 해요? 어쨌든 물은 엎질러졌고 저는 제가 헤쳐나갈 미래가 밝지 않음을 감지했죠.


예상대로 전학 첫날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어 중간고사를 봐야 하는데 필기를 보여달라고 해도 아이들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니 제가 중간고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네요.


어쨌든 저는 선생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나의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증명하겠다며 공부를 멀리하였습니다. (그게 결국 내 손해건만..)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었습니다. 우리 반에 골칫거리가 한 명 들어왔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업 시간이나 조회, 종례 시간이면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선생님을 응시하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저 같은 학생이 앞에 있다면 어후, 너무 무서울 것 같네요.


선생님은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모든 선생님에게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학생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교과서만 읽다 나간 선생님들은 솔직히 많이 싫었습니다. 아이 컨택도, 상호작용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업 아닌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은 자기 본분에 충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이 보이는 선생님들이나 정상적으로 수업하시는 선생님들 말씀은 열심히 경청했어요.


선생님의 과목은 하필 제가 체육 다음으로 싫어하는 미술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과목인데 선생님까지 싫으니 미술 시간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그나마 그림이면 대충이라도 그리겠는데 저희의 미술 수업은 만들기 위주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도 기대보다 공부도 못하는 애가 미술까지 못하니 더 꼴보기 싫으셨죠? 이제 와서 고백하는데 그 작품은 다 제 동생이 해준 거랍니다. 고등학생인 제 실력보다 중학생인 제 동생의 실력이 아마 훨씬 나았을 거예요.


꼴뚜기 왕자 선생님이 저를 교무실로 부르던 날이 생각납니다. 그때 반에서 15등까지인 애들한테 남아서 논술 한 편을 쓰라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위에서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시켜야 했던 입장이었을 것 같습니다만, 배경 설명도 없었고, 게다가 15등까지 명단을 가감 없이 공개를 해버린 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저는 왜 학생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15등까지는 무조건 논술을 써야 하고 그 아래 등수는 쓰고 싶어도 못 쓰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너... 너... 너...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모범생으로 살아온 저에게 교무실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야, 부탁인데 할 말 있으면 애들 앞에서 하지 말고 나한테 개인적으로 해줄래?"

"네."


교무실까지 가서 (거긴 싸워도 제가 불리한 곳이죠.) 더 토를 달 수는 없으니 저는 순순히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도 오죽하면 저를 불러서 얘기하셨겠습니까?


선생님은 저만 싫어하셨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너네들 나 싫어하지? 나도 너네들 싫어해. 내가 뭐 선생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니? 나도 선생 되려고 된 게 아니야."라는 말을 수시로 하셨던 걸 보면요. 원치 않는 직업을 갖게 된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텐데, 교사가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연민의 마음보다는 '어쩌라고? 안 맞으면 때려치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반항은 했어도 예의는 있었다니까요.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고통의 1년이 지나가고 저는 2학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선생님과의 악연이 끝난 건가 싶었는데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더군요.

아. 망했다!


2학년이 되자 선생님은 날개라도 단 양 제 모든 작품에 기본 점수를 주셨지요.

출석 번호 1번부터 순서대로 각자의 작품을 교탁으로 들고 나가서 점수를 받았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이제 막 나가는데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제 얼굴을 보더니 실실 웃으며 "어, 넌 C!"라고 외치셨죠. 제가 아직 교탁까지 나가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렇죠. 그나마 1학년 땐 선생님도 자기 반 상위권 학생의 점수를 팍팍 깎기가 마음에 걸렸겠지요. 그러나 이젠 담임도 아니니 점수 깎는 데 얼마나 자유로웠겠어요? 그렇게라도 통쾌한 복수를 하셨다고 느꼈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사람을 향한 증오는 시간이 지나고 부딪히는 횟수가 줄어들면 옅어지는 듯합니다. 선생님이 담임이 아닌 것만으로도 저는 숨통이 트였어요. 미술은 1주일에 2번 수업이니 선생님의 얼굴을 보는 횟수도 적었고요.

선생님이 제 작품을 보지도 않고 C를 외칠 때 저도 같이 웃었습니다. '내 작품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나도 안다. 당신이 내 얼굴만 보고 C를 외치는 것도 난 다 이해한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그 당시 선생님의 나이는 모르겠지만 선생님도 미숙해서 그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재단 공고에서 저희 여고로 오신 지 얼마 안 됐고 처음으로 맡은 담임이라 그러셨을 겁니다. 저도 미숙했죠. 친구 없이 사는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선생님께 그런 식으로 화풀이한 거였습니다. 몇 달 친구 없이 혼자 지냈지만 나중엔 친구도 생기고 괜찮아졌어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소개한 만큼 제 성적이 위협적(?)이지도 않았으니까요.


'선생님'이란 주제를 보자마자 꼴뚜기 왕자 선생님이 강렬하게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얘기는 꼭 한번 남겨보고 싶었거든요. 이 글은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자 반항아 시절인 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참, 선생님께 남은 앙금은 이제 없습니다. 제가 사과하고픈 마음이나 선생님께 사과를 받고픈 마음도 없어요.

다만 '나는 선생 되려고 해서 된 거 아니다'라는 말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불행을 학생들에게 전가하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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