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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Jul 05. 2022

첫 경험. 그 긴장과 슬픔과 그리고 두려움

 '보글보글' 매거진 글쓰기 

         7월 첫째 주 '첫 경험'


가장 중요한 '첫 경험'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짜릿함은 정말 끝내줬을 듯한데...

너무 부끄러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어질 때는 엄청난 불안감에 떨었을 것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엄습했을 것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닦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나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만남이었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편안한 만남이었기에,

무언가에 떠밀리듯이 헤어질 때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엄청난 아픔에 목 놓아 울었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닦고 싶어도 손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맞이한 아픔이었기에,

아픔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짜릿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야호를 외치며 두 다리를 쭉 뻗었습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기쁨의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지요.

그도 그럴 것이 첫 딸을 나은 후 11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으니까요.^^

일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아래의 글들은 경험담이므로 경어체를 쓰지 않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기억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기억되어 있는 대로 쓰렵니다.


 기억나는 '첫 경험' 중의 '첫 번째'

8살 때.

'장훈아~~~~'

한참 자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그마한 가게가 딸린 작은 방. 주인집의 작은 방 크기밖에 안 되는 어른 네 명이 누우면 꽉 찰만한 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작은 소리로 불렀음에도 충분히 크게 들렸다.

눈을 번쩍 뜨고 엄마를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깊은 잠을 자지 못하여 잠귀가 밝은 나만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동생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어딘가에서 노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만삭이었다.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장훈아, 주인집에 가서 주인아주머니 좀 불러와라'

숨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엄마는 말씀하셨다.

깜짝 놀란 나는 방의 작은 뒷문을 열고 4미터 앞에 있는 주인집 안방을 두드렸다.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분명 자고 있었을 주인아주머니는 방에서 바로 나오셨다.

엄마를 보시자마자 자기 집으로 가셔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고,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다.

그 사이에 동생들도 일어났고, 우린 방 밖으로 나왔다.

셋째 동생이 태어났다. 여자였다.

내 위로 11살 많은 누나가 있고, 아래로 두 살, 네 살 차이의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그 고생을 하셨음에도 딸이 나와서 엄마는 너무 실망하셨나 보다.

더군다나 남편도 집에 잘 붙어있지를 않고 집도 가난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집에 왔고, 동생 이름을 '유선'이라 지었다.

딸들을 '유'자 돌림으로 지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름처럼 아기는 너무 순하고 예뻤다.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학교가 끝나면 아기를 보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오자마자 방에 있는 유선이를 보러 들어갔는데, 두꺼운 이불이 유선이 몸 전체를 덮고 있었다.

'유선아' 하면서 이불을 들췄는데 유선이는 자고 있었다.

엄마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기에 자는 아기를 깨우지 않아야 하는데, 유선이와 놀고 싶은 마음에 유선이를 흔들며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흔들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가서 '유선이가 깨워도 안 일어나요'라고 말씀드렸으나, 엄마는 장사하시느라 유선이를 보러 가지 않으셨다.

그렇게 유선이는 기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몰랐지만, 내 예쁘고 착한 동생이 죽었고 다시는 나를 보고 웃는 눈과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울음소리를 배가 시켰다.

아버지와 나는 짐빠리(짐을 실을 수 있는 자전거)를 타고 유선이를 할머니 묘소 옆 땅에 묻으러 갔다.

포대기에 쌓인 유선이는 내가 안고서.

관에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다 그렇게 묻는 줄 알았었다. 유선이는 포대기에 쌓인 상태로 묻혔다.

'오빠'라는 말을 그 예쁜 입으로 말해보지도 못한 체.

오고 가면서, 그 이후로도 한동안 나는 유선이가 생각날 때마다 난 울었었다.

죽음이란 것을 처음으로 마음속 깊이 알았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어린아이의 죽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주의 관점에서

분자보다 더 작은 미물인 인간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ㅇ 기억나는 '첫 경험' 중의 '두 번째'

국민학교 5학년. 덩치도 커졌다.

부모님은 시장 한 복판에서 작은 쌀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쌀 배달을 해야 하니까 배워야만 했다.

짐빠리 정도는 탈 수 있다고 자신했다.

노점 상인들이 철시를 하고 길이 텅 비었을 때, 혼자 짐빠리를 몰고 나갔다.

'왼발을 자전거 페달에 올려놓고 오른발로 땅을 차서 굴러가다가 오른 다리를 번쩍 치켜올려 엉덩이를 안장에 안착시키고 페달을 굴리면 된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안장에 올라가기 전 단계까지는 이미 많이 해봤기 때문이다.

왼발만 페달에 올린 체 오른발로 땅을 차면서 타봤기 때문에 핸들링에는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출발.

굴리는 오른발은 신이 났다.

자전거의 속도가 붙었다. 점점 얼굴은 긴장이 되고 가슴은 콩닥거렸다.

올라타는 것은 너무 쉬웠다. 

엉덩이를 안장에 걸치고 오른발을 페달에 올려놓은 순간 자전거의 핸들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핸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커밍 쑤운.

(쓰다 보니 길어져서 나누어 발행합니다. 실시간으로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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