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혼이 쑥 빠져나갈 듯 정신없는 하루의 연속이다. '이런 날은 좀 일찍 데리러 와 주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스치니 없던 불평도 솟아날 지경이다. 도대체 학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도 학부모가 되면 저렇게 되려나?'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나 가끔 그들의 이기적임에 두 손 두발 다 들겠다.
아까 낮에 차량 운행을 하며 수아 엄마가 퇴근하는 걸 보았다. 나랑 그렇게 반갑게 인사해놓고는 7시가 넘어가도록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 맨날 이런 식이다. 매주 목요일이 휴무임에도 목요일에 더 늦게 아이를 데리러 오는 것 만 봐도 배려 없음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래도 퇴근 시간은 지켜줘야 되는 거 아닌가?' 교사들의 투정 어린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함께 맞장구치며 흠씬 욕을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깝다. '뭔가 사정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도 속이 말이 아니다.
일과 육아, 가사를 병행하며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 자기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근시간 늦어지는 게 얼마나 싫을지 예측하지 못한다는 건 거짓말 같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쯤 되면 일부러 늦게 오는 게 분명하다. 교사들이 아무 말 못 하고 웃으며 배웅해주니'호구로 보는 건가?'라는 마음이 쑥 올라온다. 오늘은교사들을 위해서라도'한 마디 똑 부러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머머. 선생님, 죄송해요. 집안일을 하다가 시간을 놓쳤지 뭐예요? 제가 요즘 이래요. 어떡하죠? 많이 늦었죠?"
호들갑스러운 수아 엄마의 너스레가 현관에서부터 들려왔다. 수아 엄마를 맞이하는 교사의 표정도 황당한 모습이다. 그래도 어쩌랴. 교사 입장이라는 게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 오늘도 아무 말 못 하고 배웅할 수밖에 없다.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은데 수아가 좀 많이 기다렸어요. 친구들이 모두 가고 나면 수아 표정이 좀 어두워지거든요. 선생님들이 함께 놀아주는데도 친구들이랑 놀 때와 좀 다른가 봐요."
"그래요? 우리 수아가 선생님들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마 좋았을 걸요? 집에서는 친구들 가고 혼자 남는 시간이 제일 좋다고 하던데요?"
"아~ 예... 그랬어요? 그랬구나... (수아를 보며) 수아야. 선생님이랑 둘이 있는 것도 괜찮았어?"
"(수아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끄덕한다.) 응..."
5살 수아가,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오후 4시 30분부터 혼자 8시까지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을 즐거워한다고 말하는 수아 엄마의 말이 정말인지 의심스러워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 하는 교사의 위치가 좀 서글프다.
아침부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교사들이 한층 들떠있다. 저마다 저녁에 데이트며 가족 모임이 있다며 '오늘은 아이들이 일찍 귀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원장님, 오늘은 수아 어머니께서 일찍 오시겠죠?"
"그러시겠죠.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방학식이라 아이들 12시면 다 집에 갈 텐데 12시부터 수아만 남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설마, 진짜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죠? 오늘도 8시가 훌쩍 넘어오시면 어떡해요?"
"원장님, 혹시 수아 어머니께 미리 연락을 드리면 안 되는 거겠죠?"
교사들 의견이 분분하다. 어린이집은 국경일과 일요일을 제한 모든 요일 12시간 항시 운영되어야 한다. 운영지침이 그러하니 교사 입장에서는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다. 방학식, 행사, 혹은 다음날이 명절 연휴라고해도 학부모에게 양해를 구할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학부모의 배려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교사들의 마음도 덩달아 섭섭해진 모양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행사로 산타잔치를 했다. 아이들 몰래 학부모에게서 미리 선물을 받아뒀다가 방학식 이벤트로 진행되는 행사이다. 산타할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면 아이들이 다가가 선물을 받으며 칭찬 한 마디씩 듣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낯을 가리는 수아는 산타할아버지의 등장과 함께 겁을 잔뜩 먹었더랬다. 집으로 돌아가 선물을 열어보기로 했지만 5살 아이들에게 기다림은 어려운 과제이다. 받자마자 선물을 뜯어내는 아이들 틈에서 수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수아야. 왜 그래?"
당황한 담임교사가 수아에게 다가갔다. 좀체 말이 없는 수아다. 울고 있는 수아를 무릎에 앉히고 꼭 안아주었다.
"수아야. 분홍 선생님(원장의 별칭)한테 얘기해줄래? 왜 울어?"
"산타할아버지가 수아만 싫어해."
"산타할아버지가 왜 수아를 싫어해?"
"수아가 맨날 울어서 수아 미워해."
"아니야. 수아가 얼마나 예쁜데 수아를 미워해?"
"친구들은 장난감 선물 주고 수아만 책 줬잖아. 나 책 싫어!!"
수아 엄마가 준비해 준 선물은 동화책이었다. 5살 수아에게 책은 선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수아에게 먼저 전해주었다.
"수아야. 이거 분홍 선생님이 수아 주려고 준비한 건데 수아 먼저 줄까?"
"이거 뭐야?"
"같이 열어볼까?"
"응."
과자꾸러미를 준비 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러미 안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랑 사탕목걸이, 반짝이는 요술 공 등을 넣어두었다. 수아는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이거 수아가 좋아하는 건데..."
"그래? 다행이다. 수아가 좋아할 것 같아서 분홍 선생님이 준비해둔 거야."
사탕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니 수아는 울음을 그치고 활짝 웃었다.
역시 수아 엄마는 퇴근 시간 7시를 훌쩍 넘기고도 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교사들을 5시에 모두 퇴근시키고 홀로 남아 수아와 함께 놀이 중이다. '늦는다고 전화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스쳤지만 늘 있는 일이기에 마음을 비웠던 터라 괜찮았다. 문제는 수아였다. 벌써 7시간째 혼자 남아있다. 수아에게도 크리스마스는 행복한 날이어야 할 텐데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한 상태다.
"원장님, 제가 좀 늦었어요. 어머!! 오늘도 우리 수아만 늦었네요? 아코, 죄송해서 어떡해요?"
"오늘 방학식이라 아이들이 12시에 모두 하원했거든요. 오늘은 수아가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
"그랬어요? 그럼 전화를 주시지... 전 12시에 하원하는지도 몰랐잖아요."
"가정통신문에도 나가고, 어제 하원할 때 12시에 데리러 오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랬나?? 암튼 그건 잘 모르겠고, 제가 깜빡 잊을 수도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전화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우리 수아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수아야~ 속상했어?'제가 지난번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수아 담임 선생님은 정말 배려가 너무 없네요!"
적반하장이었다. 되려 수아 엄마에게 야단맞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래서 애 봐준 공이 없다고 하는 건가?' 싶으니 종일 수아와 함께 놀아줬던 노력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네요. 자주 늦으시니 오늘도 야근이신 줄 알았어요. 다음에는 미리 연락을 드릴게요."
"아니요. 그러실 것 까지는 없고요... 오늘 우리 수아가 혼자 계속 있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하네요. 수아가얼마나 엄마를 기다렸겠어요? 아휴... 우리 수아 속상해서 어떡해... 오늘까지만 다니고 그만둘게요."
"네?"
"저도 그동안 기분이 좋았던 건 아닌데 그래도 원장님 봐서 계속 다녔던 거거든요? 제가 좀 자주 늦는 건 알고 있지만 올 때마다 사과하는 것도 기분 나쁘고, 선생님들 표정이... 뭐... 암튼 더 말하면 구질구질해지고... 오늘까지만 다니고 그만둘 거니까 수아 물건은 정리되는 대로 연락 주세요. 제가 찾으러 올게요."
방학을 앞두고 빠져나가는 원아들이 좀 있다. 대기 원아가 있을 때에는 어려움이 덜하지만 학년말에 퇴소를 하면 석 달가량 운영에 어려움이 생긴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방학과 명절을 낀 4/4분기 석 달 원비가 아까울 법도 하지만 한 해 동안 살뜰하게 원아들을 돌봐온 교사 입장에서는 많이 서운할 일이다.
우리 어린이집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는 기관이다. 수아는 7시 30분에 등원해서 보통 8시가 되어 하원을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수아는 연장반(9시부터 4시 30분)으로 등록한 원아였다. 가끔 한 번씩 늦기 시작했다가 차츰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모든 편의를 2년째 봐드렸음에도 마지막 마무리를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이 서운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아가 떠나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선생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약속 있으세요?]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의욕 없이 축 가라앉아있던 마음을 읽은 걸까? 그의 문자 하나로 안개 낀 마음에 불빛 하나가던져지는 것 같았다.
[아니요. 이제 막 아이가 하원해서 어린이집 정리 중이었어요.]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아직도 근무 중이세요?]
[네...]
[그럼, 어린이집이시겠네요?]
[네...]
[약속은 없으시고요?]
[네...]
[제가 갈까요?]
[어린이집으로요?]
[네. 같이 맥주 한 잔 어떠세요?]
[음... 좋죠.]
술을 마셔본 적은 없다. 무슨 생각으로 그의 문자에 '그러자!'라고 답했는지 모르겠다. 수아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검은 비닐봉지 하나 달랑 들고 그가 왔다. 현관에 들어서는 그가 오늘따라 더 반갑게 느껴졌다.
"맥주 마실 줄 아세요?"
"왜요? 못 마실 것 같아요?"
"네... 술 한번 안 마셔본 것 같아 보이거든요."
"아니거든요? 엄청 잘 마시거든요?"
"그럼 다행이고요... ㅎㅎㅎㅎㅎ"
"왜 웃어요?"
"그냥, 웃음이 나네요... ㅎㅎㅎㅎㅎ"
괜한 호기를 부려본다. 술을 마셔본 적도 없으면서 한 모금에 취하면 어쩌려고 큰소리를 쳤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숫기 하나 없이 숙맥인 모습으로 비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그와 함께 교실 바닥에 앉았다.
"오~ 진짜 술 잘 마시는데요? 마실 줄 아는구나..."
"제가 잘 마신다고 했잖아요. 사람을 못 믿네..."
"사실 제가 술을 잘 못 마시거든요. 소주 두 잔이 치사량이고, 맥주 반 캔이 주량이에요."
"정말요? 지금 한 캔 다 마시고, 두 캔짼데 괜찮으세요?"
"어쩌면 제가 이거 마시다가 갑자기 여기서 쓰러져 자버릴 수도 있어요."
"자요? 여기서요?"
"제가 술 마시면 잠을 자거든요."
"그러면서 같이 '술 마시자'라고 하면 어떡해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요..."
"피...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슨..."
"왜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2년 동안 정성껏 키운 아이 한 명이 오늘 그만뒀어요. 두 돌 때쯤 됐을 때부터 하루 12시간씩 키웠던 아이라서 마음이 좀 좋지 않네요."
"그랬구나... 자~ 짠~!! 한 잔 마시고 슬픈 마음 잊기!!"
그와 함께 맥주 두 캔씩, 안주도 없이 마셨다. 처음 마셔보는 맥주였지만 마셔보니 별 것 아니다 싶었다. 어스름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술기운에 달아올라 상기되어 보였다. 말도 조금 어눌해지고 아까부터 자꾸 히죽히죽 웃는 그다.
"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나 봐요?"
"왜요?"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잖아요."
"제가요? 언제요? ㅎㅎㅎㅎㅎ"
"정말 취했나 보네... 지금도 웃고 있거든요?"
그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러누웠다.
"어... 바닥이 차가울 텐데요... 그냥 누우면 안 되죠."
'낮잠 이불이라도 깔아줘야 하나?' 술에 취한 남자는 처음이라 어찌해줘야 할지 막막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깐 난감해할 때 그가 손을 잡아끌었다. 휘청~ 그의 곁에 내 몸이 기울어졌다.
"앗!!"
"잠깐만 이렇게 있을까요?"
"어... 아뇨... 불편해서..."
그의 잡아끔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괜찮지도 않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선생님, 우리 그냥 오빠, 동생 할까요?"
"......"
"내가 오빠 맞잖아요. 그죠?"
"......"
"우리 선생님은 오빠 생기는 거 싫구나..."
"......"
"왜 말이 없어요~~~ 싫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지금 자세가... 좀..."
"어? 자세만 아니면 오빠 하는 거 괜찮은 거예요?"
".... 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럼 우리 그냥 사랑할까요?"
"네?"
"난 선생님 처음부터 좋아했거든요... ㅎㅎㅎㅎㅎ"
"아... 네..."
"어~ 싫다고 안 하네? 그럼 우리 사귀는 건가?"
".... ㅎㅎㅎ"
"싫으면 피해요. 알았죠?"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입술에 짧게 '쪽' 뽀뽀를 했다. 싫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어? 안 피했어요. 분명히... 난 피하라고 했는데..."
"......"
말없이 그의 입술이 다가와 포개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 그와 함께 한 첫 키스는 따뜻하고 달콤했다. 하루의 피곤과 설움을 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