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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24. 2020

여신 강림

             공감의 눈물

내 나이에 맞지 않는,

10대와 20대가 좋아할 만한 드라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의 순박하고 털털하면서도 

매 상황에 반응하는 모습들이 신선하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보고 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늦게 자기 때문에 티브이를 돌리다가 얻어걸려서,

어차피 잠도 안 오고 해서 보다 보니 괜찮아서.


주경은 못생겼다는 이유로(실상은 못 생긴 것이 아니라, 피부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 

괴롭힘을 당한다.

집이 이사를 하게 되어 학교를 옮기게 되고, 

마침 개인방송을 통해 메이크업을 배우게 된다.

메이크 업, 헤어스타일 변화만으로 추녀에서 미녀로 변신하고 전학 간 학교에 등교한 날,

여신이 강림했다면 난리가 나고, 서로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수호는 전교 1등의 성적에 외모도 출중하며 잘 살고 못하는 게 없다. 한 마디로 완벽.

한 가지 문제는, 자살한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경과 수호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데, 

말은 못 하고 오히려 허튼소리를 하고 나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몇 회가 지나왔다.


어제는,

화장하지 않은 모습도 예쁘다고 말하는 수호가 혹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축제 끝나고 영화 보자고 톡을 보내고, 수호는 아주 좋아하며 그러자고 바로 답장을 했다.

하지만, 다음 날 만난 수호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고,

주경이에게 "그동안 불쌍해서 잘해줬었다"며 막 쏘아붙인다.


주경이의 울음이 시작된다.

누가 보건 말건 돼지 탈을 들고, 복도를 걸어가며 엉엉 운다.

"내가 못 생긴 것을 아는데 나를 좋아할 리가 없지."

"그렇다고 불쌍하다고까지 해야 하나?"

"그동안 화장했을 때나 쌩얼일 때나 잘 대해줘서 고마웠었고, 좋아하는 마음도 생겼었는데..."

주경이는 슬픔과 아픔을 울음으로 씻어 내린다.


축제의 마지막은 초대 가수가 장식한다.

스피커에서는 세현이(자살한 수호 친구)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맨 뒤에서 듣고 있던 수호는 오열한다.

수호의 울음이 시작된다.

아무리 친구가 비난을 해도 무덤덤하게 듣고만 있었던 수호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울다가 결국 쓰러지려 하고,

그 모습을 주경이가 보게 된다.

주경이는 수호를 위로하려 하지만, 수호는 뿌리치고 울면서 자리를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주경이, 다 잊어버리려고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쿨 하게 침대에 몸을 던진다.

아빠가 가지고 온 옷들에서 수호의 옷을 보게 되고(주경이 언니가 수호 옷에 구토를 해서 세탁을 해주게 되었다)

이전 학교에 다닐 때 괴롭힘을 못 견뎌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고 했을 때 말려 주고,

근시가 너무 심해 안경이 없으면 거의 안 보이는(수호가 뛰어내리려고 난간에 서 있던 주경이를 잡아당길 때

함께 넘어지며 안경이 멀리 가버렸다.) 자신을 업고 1층까지 데려다주었던(꼭 이럴 때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난다) 사람이 수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경이는 "죽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에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라고 말했던 수호를 떠올리며 울면서 그 옥상을 향해 달려가고,

옥상 한쪽 구석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는 수호를 보게 된다.

그동안 꾹 꾹 누르고 눌러서 버텨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진 수호는 소리 내어 폭풍 눈물을 흘리고 있다.

수호에게 다가 간 주경이.

"알아, 다 알아" 하면서 수호를 안아주며 드라마가 끝난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함께 울었습니다.

주경이는 즐겨 먹는 주스를 사주고, 예쁘다고 말해주고, 새로 산 세제 냄새가 괜찮은지 알아보려고 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안아주는 수호에게 심쿵을 느꼈고, 함께 영화 볼 꿈에 한껏 부풀어 있다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아주 냉정하게 대하는 수호에게 화가 났을 법도 한데,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열하고 있던 수호를 위로하려 했고,

수호가 처한 상황을 알고 나서 정신없이 밤 길을 달려 수호에게 갔고,

쭈그려 앉아 울고 있던 수호에게 

1) "왜 그래, 왜 울어"

2)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하는데 쪼잔하게 왜 울고 있어"

3) "네가 죽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필요가 있어?"

4) "자살한 놈이 잘못이지. 어차피 네가 말렸어도 걔는 자살했을 거야"

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고

"알아, 다 알아"라는 말만 하며 안아줍니다. 

공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지요.


1) 우는 사람에게 이유를 물어보는 말입니다. 물론 우는 이유가 있지요. 

그런데 너무 슬플거나 너무 아플 때는 우는 사람도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마냥 아프고 마냥 슬프거든요. 

이 말은, 결국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말 밖에 안됩니다. 

왜 우는지 궁금한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2) 이 말을 들은 어떤 꼬마는 "오늘 이미 세 번 다 울어버렸는데 어떻게 해"라면서 또 울었답니다.

남자가 울면 쪼잔해 보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남자도 아무 때나 울어도 됩니다.

여자 입장에서 오히려 울 줄 모르는 남자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순전히 제 의견일 뿐입니다)


3) 친구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데, 책임 여부를 따지다니... 이런 말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4) "말리기라도 해 봤다면, 그 친구를 믿어주었다면"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했더라도 친구는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욕이니까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종류의 욕.

얼마 전에 했던 드라마에서 "자살 한 사람은 환생을 못한다"라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아주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살 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자살 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한 그들에게 이러한 형벌까지 더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주변에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말릴 것입니다.

하지만, 고민은 될 것입니다. "과연 말리는 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인가"라는.

자살까지 가게 된 이유를 내가 다 해결해 줄 자신이 있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고 강력하게 말리고 해결해 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칫 잘못된 오지랖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살은 분명 아픈 사실이지만,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류의 말로 간단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강력한 자살 반대론자입니다.

"자살은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부모님께서 주신 목숨을 함부로 버리고, 자기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는 행동을 결코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살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저 안타까워하고, 나와 친한 사람이라면 수호와 같은 마음으로 엉엉 울겠지요.


주경이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저는 많은 것을 느끼며 배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제는 압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기도 여력이 없을 터인데,

냉정하게 자신을 차 버린 사람에게 다가가서,

가장 최고의 위로를 해주는 주경이의 모습에서 천사를 보았습니다.


"알아, 다 알아"

토닥토닥해주면서 함께 울어주는 주경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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