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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Jan 25. 2021

모르면 용기가 필요하다. 마지막 편

목숨을 걸다

출정 준비는 끝났다.


아내는 여수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7년째 격주 부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이 진 빚을 갚아야 해서 결혼 후 7년 동안 신혼살림도 차리지 못하고 각자 살고 있었다.

부모 봉양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맞벌이를 해도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3년간 숙직실에서 살았었는데, 

이제 기거할 곳이 필요해져서 국군 수도병원(당시 강서구 등촌동) 건너편에 반지하 월세 방을 얻어 놓았다.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살림은 14인치 브라운관 티브이 하나와

옷과 이불을 넣어 놓은 천으로 된 작은 캐비닛 하나가 전부였다.

(출처 : 다음 이미지. 티브이는 이것과 똑같고, 캐비닛은 색깔이 달랐다)

방학을 해서 아내가 서울에 올라왔다. 

2월 12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수술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리 올라와서 함께 있었다.

(아들 둘을 낳을 때 내가 함께 있어주지를 못했었다. 둘을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낳았기 때문에 막내도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조건 좋은 병원에서 낳게 하고 싶었다. 서울 아산병원에 파견 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병원 시설과 의료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서 비록 사는 곳에서 멀지만 그곳으로 결정했었다.)

좁은 방인데, 가구가 이것이 전부이다 보니 엄청(?) 넓어서 네 명(7살, 5살 아들이 있었다)이 발 뻗고 누워서 자도 넉넉할 정도였다.


11일에 입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주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집에서 김포공항까지는 버스로 자주 가봐서 도로 사정이 익숙해서 괜찮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것도 서울의 도로를 달린다는 것이 겁이 났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타고 갔다.


12일 출산일이다.

아내와 신생아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데리고 오려면 퇴원할 때까지 길을 익혀놓아야 했다.

그래서 내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매일 왔다 갔다 하면 왕복 서너 번 하게 될 것이니까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혼자 타고 가는 것이니까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무 일 없이 다녀오지 못하면 내 차로 데리고 올 수 없는 것이니 길을 제대로 연구하고 출발해야 했다.

서울 지도 책을 사놓았기 때문에 가는 길을 찾아보고, 

갈래길이 나오는 곳은 따로 종이에 그려서 운전석 옆에 놓았다.

길은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올림픽대로를 탈 때까지가 좀 어려울 것 같았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쭉 가면 별문제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올림픽대로까지 가는 길이 녹록지가 않았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차도 엄청나게 많았다.

서울에 그렇게 차가 많은지 몰랐다.

신호등과 교차로는 또 왜 그리 많은지.

브레이크를 밟고 서는 것과 다시 출발하는 것이 가장 긴장되는데 자주 서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차선을 지키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옆 차들은 왜 그리 나에게 바짝 붙는지.

끝차로에는 버스나 차들이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끝에서 두 번째 차로를 타고 가는데,

안전거리를 유지할 틈도 없이 차들이 끼어들고,

끝 차로에 잘 있던 버스는 갑자기 내 앞으로 머리를 틀고

도로 옆 작은 길에서는 차와 오토바이가 툭툭 튀어나와 나에게로 달려드는 것만 같고,

신호등도 봐야 하고, 운전도 해야 하고, 전방 주시도 해야 하고, 옆에도 신경 써야 하고,

차들이 끼어들거나 끼어들 것 같으면 그때마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고, 마음은 요동을 쳤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김포공항을 갔다 올 때만 해도 도로주행도 별것 아니라고 의기양양했던 내 모습은 

이미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버리고 없었다.


올림픽대로와의 합류지점을 한참 앞둔 곳에서부터 차로를 변경해야 했다.

앞차와 간격을 충분히 유지하고 좌측 사이드 미러를 힐끔힐끔 보다가 차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일 때 한 차로씩 옮겼다. 

어떻게든지 1차로까지 가야 올림픽대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속도를 올려야 했다.

차들이 적당한 속도로 오고 공간도 잘 확보되어서인지 차로 변경은 의외로 쉬웠다.

속도를 조금(60) 올렸어도 운전은 할만했다. 

속도 때문에 겁이 나지는 않았다.


올림픽대로에 접어들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들도 빨리 달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섰는데,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차로도 넓고, 옆에서 튀어나오는 차도 없고,  큰 차들도 거의 없고, 오토바이는 아예 없었고,

차들도 생각보다 빠르게 달리지 않았다.

신호등이나 교차로도 없어서 브레이크를 밟을 일 없었다.

기어를 4단까지 올리고 액셀을 밟았다.

시속 80. 

이거 뭐 정말 별것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신이 났다.

한참을 달리는데 차가 막혔다. 이런.

섰다 갔다를 반복하는데 이거 완전히 죽음이었다.

결국 시동을 꺼트리고 말았다.

어차피 차들이 밀려있었고, 경사로도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침착하게 시동을 걸고 싶었지만, 이거 시동이 꺼지니 너무 당황스럽고 꼭 죄지은 사람 같았다.

시동을 걸고 계속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데, 클러치 밟은 다리가 점점 아파왔다.

이거 완전히 장난 아니었다.

겨우 뚫려서 가는데, 정말 살 것 같았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서울 아산병원에 도착했다.

주차는 너무 쉬웠다. 멀더라도 비어있는 곳에 주차를 했으니까. 

주차를 해놓고 병실로 가는데, 이거 뭐 흡사 개선장군이 따로 없었다.

병실에 가서 내가 차를 몰고 아무 일 없이 왔다는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칭찬을 받았다. 역시 잘한다고.ㅋㅋㅋ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울 아산병원에서 나와서 강동대로와 합류한 후 올림픽대교 남단 교차로에서 유턴하여 올림픽대교 쪽으로만 가면 올림픽 대로를 바로 탈 수 있어서 아주 쉬운 코스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출처 : 카카오 맵)
(출처 : 카카오 맵)

지도에서 보다시피 서울 아산병원에서 나와 우회전한 후 조금 가다가 강동대로와 합류한 후 1차로까지 가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올림픽 대교 쪽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얼마나 빠르던지, 4차로에서 한 차로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차로도 옮기지 못하고, 우회전하여 다시 아산병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산 병원에 들어가니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을 피해야 했다.

서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다행이었다. 

이렇게 네 바퀴를 돌았다. 


해는 기울어가려 하고, 해가 저물면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없는데

1차로까지 가지 못하면 영영 집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다른 길은 전혀 모르니까.

너무 난감했다. 여전히 차들은 쌩쌩 달려오고, 

충분히 공간이 생겼다 싶어 차로를 옮기려고 하면 어느 사이에 내 옆까지 차가 와버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까짓것 밀고 들어가면 알아서 속도를 줄여주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도로주행을 무려 두 번이나 하면서 내 앞에 끼어드는 차는 수도 없이 많았었다.

다 당당하게 끼어들어왔었다.

심지어 전혀 공간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끼어들었었다.

나라고 못할 것은 없다.

속도를 줄여주지 않아도 나는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지 1차로까지 가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사고를 감수하지 않으면 차로 변경 자체를 시도할 수 없었으니까.


강동대로와의 합류 지점에서 차로를 네 개를 바꿔야 1차로에 진입한다.

차가 좀 멀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냅다 들어갔다. 

차로 하나하나 바꿀 때마다 차는 더 가까이에 있었고, 그래도 공간은 있어 보였기에 들이밀었다.

2차로에 들어갈 때 갑자기 경적이 빵~~~~~~~~~.

얼마나 다가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대로 달렸으니까. 사고는 나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었다.

드디어 1차로에 들어왔다. 유턴할 수 있는 지점을 조금 남겨두고.

가슴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땐 선팅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터라 내가 훤히 보인다.

옆을 쳐다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에게 뭐라 할까 봐.


그렇게 목숨 걸고 끼어들고 나서 유턴을 하고 올림픽 대교를 향해서 가는데,

시험 합격할 때만큼 기분이 좋았다. 너무 뿌듯했다.

올림픽 대로를 달리며 공간 여유가 생기면 끼어들기 연습을 했다.

사이드미러를 보고 앞을 보는 연습을 했다. 

순간 모든 정보를 눈에 담는 훈련을 했다.

당시에는 룸미러를 봐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룸미러는 뒷좌석에 타고 있는 사람 얼굴을 보거나, 내가 거울을 봐야 할 때 쓰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물론 알았다고 할지라도 룸미러를 봤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올림픽 대로를 벗어나 차들이 더 빽빽한 도로를 달릴 때도 끼어드는 시도를 했다.

올림픽 대교에서 달려오는 차들에 비하면 너무 느리게 달려오는 지라 끼어들기가 너무 쉬웠다.

차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이제 끼어들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퇴원할 때까지 세 번을 더 왕복했다.

물론 두 번째부터는 강동대로 차로 변경은 병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방에 성공했다.

차들도 그리 빠르게 다가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나의 도로주행 연습은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아내와 딸을 내 차에 태워 아주 안전하고 안락하게 집으로 데려올 수가 있었다.

내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탄 아내는 대만족.

  

내 첫 차는 나의 운전 실력을 일취월장시키고

그해 여름 에어컨이 되지 않고 차 앞 유리문이 작동이 안 되어 결국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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